서영식
시멘트 길 위 선명한 발자국 앞에서
걸음의 주인을 생각한다
그에게도 뒤편
눈밭을 걸었던 날이 있었을까
길의 뒤편과 길의 뒤편이 이어진
검고 먼 그늘 산맥 길을 따라
만년설에 발을 묻으며 그도
시커먼 눈 덮힌 봉우리를 지나
걸음 걸음이 얼음 얼음이 되는
발자국을 묻어두고 떠난 적이 있었을까
그에게도 산다는 것은 뒤편
녹지 않은 눈길을 걷는 일이어서
시린 길에 맨발의 걸음을 세워두고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참아라
걸음 걸음마다 걸음 걸음을 속이고
걸음을 버리며 발 벗고 맨발로
도망친 날들이 있었을까
그늘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별을 향하여
녹지 않는 뒤편 어두운 눈발을 떠날 때
슬픔은 늘 그늘의 몫이었고
그늘과 함께 얼어붙은 눈의 몫이었고
그늘과 눈과 함께 뒤엉킨 뒤편의 몫이었다고
점점 멀어지는 눈무덤 속 발자국들에게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을까
발 벗은 걸음은
모든 발 벗은 걸음을 닮아서
봉분 잃은 유골처럼 드러난
혈육 같은 발자국에 가만히
발을 맞추어 본다
서러웠구나
저수지처럼 그렁그렁
깊은 눈물 고인 발자국이
질끈, 눈을 감는다
-월간 《시인동네》 2017. 3월호
가진게 발뿐이어서 그 발로 걷고, 기고, 길을 떠나야 했던 시인의 족적엔 눈물이 그렁거리고 먼 산맥의 검은 그늘이 잠들어 있다. 뒤편에 남겨 둔 무수한 발들과 그 발들이 차마 떨치지 못한 슬픔들, 서러워서 복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