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rtistical

김태정을 기억하며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by browne

시인 김태정은 1963에 태어나 2011년에 죽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는 해남의 시골집에서 암으로 쓸쓸하게 죽었다. 그녀는 창비에서 펴낸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한 권의 시집을 데뷔작이자 유작으로 남겼다.


그녀를 아끼던 동료 몇몇이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그것도 이젠 다 지난 일이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 물론 그녀가 꼭 기억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시는 삶에 드리운 가난과 쓸쓸함을 맑고 고요한 눈으로 관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녀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후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걸작을 남긴 것도 아니고 그녀가 굳이 오래오래 기억되어야 할 이유는 찾기 힘들다.


그녀의 시는 80년대를 관통했던 민중시를 닮아 있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막노동에 가까운 일들을 하며 살았고 그런 것들이 시에 투영되어 있지만 그녀의 시에는 민중시들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히 지향했던 바가 담겨있지 않다.


나는 단지 그녀의 시에 배어있는 쓸쓸함이, 그렇게 생긴 그녀의 삶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그녀가 가여워서,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다만 기억이라도 하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시와 삶은 너무도 평범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그 또한 이젠 잊음직도 하지만 그래도 기억할 것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일종의 의지(意志)이고 그 의지를 지탱하는 것은 기억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억하는 한 그 주체는, 그 대상은 불멸한다. 이런 주장이 스스로도 좀 가소롭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나는 주장한다. 혹은, 하찮고 시시하며 지극히 사적인 추모사업이라고 해두자.






세상의 불빛 한 점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며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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