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와 단 것, 술은 이제 끊으세요"

그럼 뭘 먹고 살라고?

by browne

"밀가루와 단 것, 술은 이제 끊으세요"


모니터만 주시하며 의사는 심드렁하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머뭇거리자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 네…"


풀이 죽은 내 대답에 그는 약간은 상냥한 투로 ”이제 조심하셔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아니 그럼 밀가루도 아니고 달지도 않은 씀바귀나 피망 같은 것들이나 먹으란 말입니까?"


이런 항변이 가슴에서 잠깐 요동쳤지만 그가 "그렇죠" 하고 대답할까봐 두려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할말도 없는 나는 울울히 물러났다. 간호사가 다음 환자를 불렀다.


그가 말하는 밀가루는 밀가루가 포함된 모든 음식을 의미하며 단 것은 설탕이나 액상과당이 포함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간 내가 좋아하고 일상적으로 먹었던 음식 리스트를 펼쳐놓고 그의 말을 적용해 보면 항목의 2/3는 당장 날라갈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가쁜, 내 일상을 지탱해준 그 평범한 음식들, 라면, 짜장면, 짬뽕, 칼국수, 피자, 냉면, 빵, 튀김, 만두, 햄, 어묵, 햄버거, 후라이드 치킨, 등등등등... 천만다행히 콜라 같은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술은 또 어쩔꺼냐. 나의 사랑 에일맥주, 하이볼, 잭콕, 좋아하는 스넥들, 아이스크림은? 이것들이 나였고 내가 이것들이지 않았나. 이것들을 먹지 말라고?


의사의 지시는 매우 간단했지만 그 말은 21세기의 서울에서 전기없이 살라는 말처럼 치명적이다. 전기가 없으면 이제 인간은 산 송장이다. 반쯤 남은 핸드폰의 배터리마져 나가면 그건 그냥 별도 없는 한밤중의 사막에 던져진 것 아닌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니, 문명 자체가 멈출 것이다. 그런 깜깜한 사막에서 이슬을 받아서 먹으란 말처럼 의사의 지시는 암담했다.


사실 그는 음식에 대해 말했지만 엄밀히 그것은 내 삶의 방식, 습관을 전면적으로 바꾸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다행히 나는 "음식의 즐거움을 포기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이런 주의자는 아니다.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지 음식을 먹기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음식의 즐거움 보다는 나의 건강과 내 삶 자체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아무 생각없이 어것저것 먹지 않을 것, 저녁을 먹고 나서는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 것도 먹지 말 것. 정 입이 심심하면 과일 한 두'쪽', 차 한 잔 정도로 만족할 것. 기름진, 튀긴, 짠, 단 밀가루 음식들을 피할 것, 흰 쌀밥도 잡곡밥으로 대체할 것, 금주(라고 쓰고 절주라고 읽는다), 무엇보다 배터지게 먹지 말 것... 이건 나에게 산속의 스님이나 묵언 수행하는 수도사들 같이 전혀 다른 삶을 살라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 어렵다. 하나도 바뀌지 않은 환경과 아귀같은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그 짓을 해야 하니 말이다.


한쪽에서는 음식이 넘쳐나고 한쪽에서는 비만의 위험과 경고가 넘쳐나는, 그 양 극단이 또 거대한 산업이 되고 있는 이 분열된 세상은 분명히 잘못됐다. 그 극단의 와중에 나약하기 이를데 없는 개인들에겐 고문같은 선택이 강요된다. 풀떼기조차 싱겁고 적게 먹으라는. 결국 그렇게 먹었어야 했던건가보다. 풀떼기를 싱겁게, 조금만. 온갖 진보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신체는 여전히 들판을 뛰어 다니던 홍적세의 조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차라리 먹다가 죽을란다, 맛있으면 0칼로리, 이런 속삭임이 문화의 대세가 되고 먹방이랍시고 멀쩡한 청년들이 청양고추를 잔뜩 올린 라면을 10개씩 위장에 쑤셔 박는다. 그건 한 개체의 휴먼이 먹어서는 안되는 분량 아닌가. 하지만 다이어트도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풀에 뿌려 먹으란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보다는 아보카도 오일이 더 좋단다. 이것들의 가격은 마트에서 사는 식용유보다 3,4배가 넘는다. 마트의 식용유는 식용할 수 있는게 아니었나. 내가 몰랐던 거대한 또다른 식품 시장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모든 것이 산업이 되어 극단으로만 치닫는다. 나는 단지 이쪽 산업과 저쪽 산업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