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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다른 해가 뜬다.

처음으로 해를 맞이하러 마중 나갔던 사람의 이야기

by 젊은 느티나무

“연말연초엔 무얼 하며 보내실 거예요?”

연말이 되면 동료들 사이에 흔하게 오고 가는 질문. 나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바쁘게 서류들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나도 여행이라도 가야 하나.” Y는 연말부터 연초까지 일본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한 달 내내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해돋이 보러 가보신 적 있어요? 해돋이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 먹으면 진짜 기분 좋은데.”

해돋이. 살면서 단 한 번 보러 가본 적도, 보러 갈 계획을 세운 적도 없다. 그런 것에 감흥이 없는 성격인 탓일까. 뉴스로든 사진으로든 아마 수백 번은 봤을 일출이었다. 너무 많이 봐버려서 실제로 내가 봤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니까. 그리고 매일 해는 떠오르지 않는가.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왜, 그녀가 말하는 해돋이가 머리에 남았을까.


1월 1일, 처음 뜨는 해를 이번엔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 새해는 지난날들과 다르니까. 새해에는 내가 결정하고 시도하고 도전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조금 더 굳은 의지가 필요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갖춰야 했다. 이전까지의 삶에서 내 의지가 있었던가. 내내 입시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고, 취직하고. 졸업하면 당연히 직장을 구해서 사회인이 되어야 한다는, 내 이름 뒤에 아무것도 붙지 않는 무소속인 상태를 어른들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직장을 그만두기로 한 것, 그리고 당장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나를 두기로 한 것. 그건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두고 항상 제멋대로인 딸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나로선 그랬다. 일은 재밌었지만,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만두겠다는 관성적인 말은 늘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사직서는 사실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불현듯, 여기까지만 해야겠다는 다짐이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니 무언가 장치를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 조금 더 강한 정신으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선 전환점이 필요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4시였다. 좀처럼 잠을 자지 못했다. 새해라고 이웃이 친구들을 초대해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푹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래, 애매한 시간에 푹 잠들었으면 아마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 따뜻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니 다섯 시였다. 아직 캄캄한 어둠이었다. 1월 1일의 새벽은 술에 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방랑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이따금 소리를 지르고, 정처 없이 걷고, 비틀거렸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그 길을 걸으며 바로 후회했다. 왜 나는 이 두려움에 떨고 있지? 왜 이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거지?

산 입구에 다다르니 그제야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불빛이 환했다. 행사 준비하는 사람들, 경찰들, 구청 직원들로 분주했다. 입산 안내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산으로 들어섰다.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도 많았다. 모두가 새해의 일출을 보겠다고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산으로 모여든 것이다. 아마도 매년, 이른바 일출 명당이라고 일컫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새해의 첫 일출을 보러. 새해를 좀 더 잘 보내기 위해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이 그 공통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그 무수한 산들을 오르고 내린다.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멈추고 싶어도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도미노같이. 내가 멈추면 그들도 멈춰야 하고, 내가 넘어지면 그들도 넘어질지도 모른다. 더 오르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산을 올랐다. 그러다 마주한 중간지점에서 멈춰 섰고, 그 장소에서 해를 기다리기로 했다. 땀이 식고, 한 장소에서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체온이 많이 떨어져, 춥고 배고프고 어지러웠다. 해를 기다리면서 새해에 대한 다짐, 지난해에 대한 아쉬움, 소회,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 너무 힘든데, 한 시간 넘게 기다리지 말고 그냥 지금 포기하고 내려갈까. 집에 가서 따뜻하게 하고 자고 싶다. 다 포기하고 내 몸을 돌보는 게 맞는 걸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조금만 더 버티고 해를 보고 가는 게 맞는 걸까. 지금 포기하고 내려가면 올라오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부끄러울 것 같은데.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하느라 생각했던 것만큼 의미 있고 멋진 ‘해를 기다리는 시간’은 없었다. 그렇지만 해를 기다리기로 했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고, 다시 내려갈 힘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림을 택했다. 점점 사람이 차기 시작했고, 인파를 이루었을 때. 조금 안정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 많은 사람이 한 곳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모두 새해 소망을 가지고 서 있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이 흘러, 약속한 일출의 시간이 되었고 해는 떴다. 모두가 반가운 함성을 지르며 2024년 첫해를 맞이했다. 2024년이 됐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다른 것 없이 똑같겠지만, 오늘의 해는 2024년의 첫해이다. 구름에 가리거나, 흐릿하지 않은 선명한 해를 보았다. 2024년도 그러하길 바라는 작은 소망을 품은 채.

선명한 해를 보고 내려오는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날이 밝아지니 산에 오를 때 보이지 않았던 평화로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과 나무들, 새해 덕담을 주고받는 경찰과 시민들. 서로 손을 잡아주고 조심하라고 해주는 사람들. 수고하셨다고 밝게 외쳐주는 공무원들. 단순히 첫 일출을 봤다는 기쁨보다도, 우리가 모두 다 같이 기다리고, 다 같이 환호하고, 다 함께 내려오는 일련의 과정들이 따뜻했고 고마웠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설레는 마음으로 지냈다. 2024년의 좋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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