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충족조건
해가 저물기 전 마지막 운행의 매표가 끝날 때 즈음 늙은 노파가 한가득 보따리를 들고 동전주머니를 꺼내 절그럭거리는 동전 중 두 개의 은색동전을 찾아 내 앞에 낮게 내밀었다.
운행에 필요한 금액은 은색 동전 한 개였지만 미안한 기색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노파는 입술을 작게 떨었다.
'나는 건너편 파란 기와집 옆에 사는 사람인데 집사람의 약재를 가지고 가는 길이라네, 미안하지만 약재의 냄새가 고약해서 제 값의 2배를 쳐줄 테니 같이 좀 태워도 되겠나? 오늘 꼭 건너야 한다네'
강가에 살면 늘 맡는 고약한 수분의 쩌든 냄새와 물이 고인 썩은 냄새, 늪지대의 퀴퀴한 냄새를 늘 맡는 터라 두 배의 값을 쳐준다면 상관없지만 고개를 돌려 뗏목을 바라보니 이미 보따리의 냄새가 퍼져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동 또는 모두의 목적은 강을 건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안전해야 하며 운행함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고 또한 그들도 값을 지불하는 것에 이 악취는 포함되지 않았기에 결국 노파를 쫓아내었다.
악취는 남아 뗏목을 가득 매웠고, 보따리의 냄새가 남아 괴롭히는지 내 몸에 밴 쩌든 내가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지 혹은 강가에 남은 노파를 두고 떠나버린 우리가 더러웠는지는 아무도 모른 채 모두가 천천히 유영하였다.
기억나지도 않을 군주론과 마키아벨리즘이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것이기에 인지편향적이지만 그것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흥미롭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주제를 허울 없이 넘실넘실 뛰어넘게 되어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목적을 위해 과정은 무시해도 되는가'에 대해 수많은 예시와 논쟁들이 있었지만 주로 거론되는 목적물은 다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방향이었다.
그렇다면 다수와 다수의 목적이 충돌한다면 어떠한가 고작 한두 명의 차이만이 있을 뿐 수많은 사람들은 겨우 한두 명의 차이로 인해 묵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분선은 '선함'으로 구분되었고 선한 쪽은 언제나 우세했다.
'누가 선함을 논하는가' 또는 '선하다는 기준은 강자의 기준이지 않는가'등에 대한 논쟁은 제쳐두기로 하고 끊임없이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이야기는 접어두고 간단한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개인의 내면에 적용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문제 해결과 희생으로 나뉘게 된다.
물론 희생의 대상들은 역사에 남아 숭고하고 길이 칭송받아 멋과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며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신성을 얻기도 한다.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노숙자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하고도 그 집단을 위해 매주 월요일 아침 6시에 무료식사를 제공해 주는 격이라고 볼 수 있는데 비약적이긴 하지만 뉘앙스는 비슷하다.
목적에 아스라이 흩뿌려진 이들은 숭고하다. 반대로 그들이 숭고하려면 목적을 위해 흩뿌려져야 한다.
그들은 숭고하지 않고 그대로 빛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굳이 헌신과 위함에 자신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혹은 목적에 의해 희생된 자를 문자로 적기에 숭고라는 단어가 집단이 보기에 죄책감이 덜하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행위 없이 그대로가 아름다움이며 신성을 가지기에는 인간은 너무 부족하고 행위로 인해 무언가를 승화시켜 여럿의 존경과 함께 글로서 남겨져야 지만 조건이 충족되어 숭고하며 그 행위에는 존경할 예정인 이들의 목적에 부합해야 하고 글쓴이들의 잉크가 아깝지 않아야 한다.
현시대로 보자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고착화된 생각을 회고하며 다시 뜯고 살을 붙여 조립하는 방식은 좋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의 시대는 너무나도 개인주의이며 개인의 목적에도 남들을 희생시키는 바가 더러 있다.
하지만 개인으로 인해 희생시키는 누군가들과 내 목적에 훼손된 그들은 개인이 숭고해하지 않고 당연시하는 면이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