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정은 Jun 18. 2020

맛있는 걸 먹는다는 건

맛있는 걸 먹는다는 건 어쩌면 정성 가득한 음식을 한입 가득 넣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또 다른 말로

"맛은 있는데 정성이 없는 걸 먹을래?",

"맛은 없는데 정성은 있는 걸 먹을래?"에 대한 물음을 무시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둘 중에 택하라고 하면 후자이다. 맛있기만 한 음식은 가볍고 배가 금방 꺼지고 성화와 같이 음식을 빨리 먹게 된다. 정성이 깃든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포근함이 느껴질뿐더러 오랜 시간 그 음식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분법적 선택이나 질문이 싫다. 정성도 있고 '맛'까지 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


최근에는 내가 한 음식도 엄마가 한 음식도 그렇게 맛있지 않다.

시간에 쫓겨 '한국사람 빨리빨리'를 절실히 행하고 있음에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른다. 아예 날을 잡고 수미 선생님 레시피를 5번 정독하고서 준비한 음식은 썩 맛이 괜찮다. 내 음식을 먹고 맛있다 한마디 할 언니를 생각하면 꽤 즐겁게 요리할 수 있다(언니의 혀는 꽤 정직해서 맛없으면 먹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누군가의 평가를 즐긴다)


하지만 요즘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글 연재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충실히 나의 직업으로 삼기 위해 열심히 쓰고 고치며 읽고 있기 때문에, 더불어 최근에 수미네 반찬이 1막을 내렸다. 선생님의 손길과 레시피에는 정성이 있어 누군가를, 나를 위한 시선이 담겨있어 보는 나도, 따라 하게 만드는 신이한 기술이 있었다.


이제는 뭘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에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하는 식당에서 배달을 시켜보고 있다. 역 앞에 있는 돈가스 냉면, 집 앞 파스타, 꽤 어릴 때부터 먹었던 석쇠불고기, 흠, 처음 먹었을 때 감동을 잊지 못한 것일까. 아님 그때의 추억 때문에 맛있다고 느낀 것일까. 자주 시켜 먹은 것도 아닌데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같이 먹은 언니가 맛이 더 좋아졌다고 하는데도. 배가 불렀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나는 정말 배가 고프다.


비싼 레스토랑을 가거나 유명한 맛집을 가도 비슷했다. 나는 분명 맛집에 갔는데 맛있지 않다. 물론 미슐랭이나 미식가가 다니면서 인증한 식당은 맛이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아니다, 이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어떤 단체의 말보다는 개인의 말을 믿으려고 하는 편이다. 단체나 광고는 획기적이지 못한 말들로 음식을 평가하고 고전적인 방식의 맛을 요구하는 것만 같고 개인의 덧글이나 후기는 참신한 말이나 맛 표현으로 한층 기대를 부풀게 한다. 물론 그 사이에서 광고나 별점을 받기 위한 말들은 속속 뽑아낼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이 정도 되면 나는 먹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맛'있는 걸 먹기 위해 글에서까지 나의 노력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 걸 보니. 하여튼 내가 간헐적 단식을 하는 와중에도 다음 한 끼를 위해 온 시간을 쏟고 매 한 끼를 소중하게, 밥톨 하나 남기지 않고 양념과 함께 입으로 털어낸다는 것은 저번 글에서도 말해서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누군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나에게 돌아올 시선에 대해 하나씩 생각하는데, 오늘도 그중에 하나를 얘기하자면,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자체에 꽂혀서 음식을 먹는 그 자체 즐거움을 잊은 것 아닐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거랑은 좀 다른 부분이다. 나는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아직 회상된다(아마 이 회상은 다가올 진짜 맛있는 음식을 혀 안에 넣는 순간 의식의 양면에 잠시 넣어둘 것이다)   


근래에 본 웹툰 중 나와는 달리 사건(상황, 서사)이 있으나 맛에 대해 인색하게 되어버린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보고 있다(이 작품은 베스트셀러에 올라야 한다) 그는 언젠가 동네를 걷다 한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게 되는데 몇 년간 잃었던 미각을 띄게 된 것이다. 그 콩나물국밥, 마약을 탄 걸까? 의료계에서도 이상 없다고 판정한 무미에 대해 약사도 못주는 약을 내어준 것이다. 아니 이것이 정성이라는 것인가. 사랑씨와 할머니의 손길엔 무언가 닿아있는 것일까.


다들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맛있어서 내가 뽑은 우리 동네 베스트 맛집을 오랜 기간이 지나 가면, 리모델링을 했거나 확장 이전을 한 경우. 그런데 사람은 더 많아지고 회전율은 더 높아졌지만 맛이 다르다. 이것은 엄청 충격적인 것이다. 우리 동네 맛집을 잃게 되는 것이며 이거는 내 역사에 한 페이지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지역에서 친구가 올 때 어느 맛집을 뽐내며 데려가야 하는가. 맛집에 사람이 많아지고 분위기가 바뀌면서 그 정취와 정성이 달라져서이다. 바로 이 부분이 허영만 선생님이나 백종원 선생님이 말한 맛집 유지의 힘든 점이며 사람들이 '나만 알고 싶은 맛집'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야 할까.


그러고 보니 코로나 19가 시작되고 할머니를 찾아뵌 적이 언젠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곳에는 현대인의 애정을 받고 있는 고기도, 라면도, 밀가루도 거의 없다. 그럼 뭘 먹고 사냐. 별 볼 일 없는 마당에 투박한 장독대들, 수많은 장과 김치, 자연건조시킨 무말랭이, 이웃집 정순 할머님께서 주신 늙은 호박, 무릎이 아픈 할머니를 대신해 뜯어온 쑥,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하시기 전 다듬어 놓았던 더덕과 도라지, 도시에서는 찾지도 않은 것들을 그곳에 가면 할머니보다 더 반기게 된다. 할머니의 몸에는 뼈밖에 없으면서도 걸을 때마다 바닥을 울리는 나를 보며 눈 하나 꿈뻑이지 않고 말랐다며 한 그릇 더 먹으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다이어트는 필요 없다. 할머니 사전에 자식과 손녀, 손자들에게는 그 단어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밥그릇에 밥 한 숟가락 더 얹는 건 그렇게 화를 내시면서 우리는 밥을 딱 한 그릇만 먹을까 봐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주걱을 들고 밥그릇 옆에 자리를 잡고는 일어나지를 않으신다.


가끔 이런 단어(정성)는 너무 추상적이라 완연히 뜻을 해석하기 어렵지만서도 한 번씩 살갗에 와 닿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될 때면 평생을 가져가게 된다. 최근 내가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뭐였던가. 자꾸만 이 머리 아픈 생각을 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바쁜 현대인에게 정성이라는 것을 바라는 게 쉽지 않다만, 주변에는 '정성'이라는 심상보다 '시간'과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에 손길이 익숙해지는 것은 서글픈 일인 것이다. 그 가벼운 배 꼴로는 콩나물씨를 이쑤시개씨로 부르게 될지도 모르니.


이쯤 되면 각자의 뻬이보릿 음식을(favorite foods)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보자. 이것은 단순히 음식뿐만 아니라 시공간과 함께하는 사람도 들어가 꽤 구체적인 문장을 완성 짓게 하는데, 필자는 단연 독보적 일위로 할머니표 된장찌개를 뽑았다. 봄이 되면 할머니 댁에 꼭 들러야 한다. 귀하디 귀한 달래와 냉이는 할머니 밭뿐만 아니라 밥상에도 그득하다. 달래장은 없던 입맛을 돋우며 맛이 든 물김치를 들이켜 뜨거운 가슴을 식힌다. 전날 술을 그뜩 마신 삼촌이 다음 숟가락을 들기 전에 보리밥 사이로 틈을 파고 찌개 속 검은콩 두부를 넣고는 으깨 한 술 뜬다. 튀긴 미역은 사촌들의 스테디셀러이므로 밥 밑 밑장을 깔아놓고 미나리는 쌈장에 콕 찍어 깨끗하게 씻은 상추에 싸 단숨에 먹어치워야 한다. 반찬이 아무리 없는 날에도 밥에 물을 말고 엊그제 끓여놓은 된장찌개에 급하게 두부를 넣으면 방금 끓여낸 맛을 내고 갓 무친 무말랭이를 하나 얹어 한술 뜰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나는 아직 그 어린 날의 우리를 기억한다. 명절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닌, 그 아무것도 아닌 날 친척들이 할머니 댁에 말도 없이 모였을 때 먹은 음식들을. 어디선가 비릿한 조기 냄새가, 시끄러운 기름 소리가 들려온다.


작가의 이전글 닭갈비 예찬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