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 페르난데스, 수전 J. 맷 -『테크심리학』서평
우리에게 세상은 너무 벅차다. 인간 세상은 특히 더 그렇다. 가장 바람직한 우정조차 신경성 활력을 고갈시키고, 피로와 고통을 불러온다. 고독을 갈망하는 마음은 사교성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다. 사교성도 너무 오래 또는 지나치게 열심히 몰두하다 보면 짜증이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p.145(리디북스 기준)
1787년 9월, 동네 선술집에 있다가 집에 돌아온 그녀는 "7시 반쯤 집에 돌아왔는데, 여기는 깜깜하고 외로운 곳이다."라며 그런 환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방 안을 서성거리며 아프도록 울었다. 내 마음이 신의 다스림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자신의 '홀로 됨'을 신의 뜻으로 알았다. "나를 돌보는 것이 신의 뜻이다. 내 자존심을 치료하고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는 곳은 그분의 품뿐이다."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역경, 고독과 소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런 환경이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이 개인주의 때문에 외로움에 더 노출되었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사회적, 가족적 유대를 유지하기보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의 길을 걸었고, 그로 인해 자유를 얻었지만 잠재적 고독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조상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후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동시대 사람들로부터도 고립시킨다. 개인은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마음에 갇힐 위험이 있다."
우리 모두는 고독의 섬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모가 모두 그 섬에 살았고, 그분들의 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 모든 사람은 고독을 안고 산다. 지구 상에 수백만 명이 살고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고독하다. 그 누구도 영혼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각자는 고독한 방 안에 감춰져 있다.
전보는 보내는 데 돈이 많이 들고, 낯선 사람들과 연락하는 수단인데다, 시끄럽고, 마을과 교회, 주택에 위험, 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전신 선로까지 가설해야 하니 뭐가 좋았겠는가? 외로움에 빠졌지만, 전보가 해결책이라 여기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처음에는 전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결국 대다수가 받아들였다. 전화가 발명되고 4년이 지난 뒤인 1880년에 미국인의 전화기 보유 대수는 1000명당 1명뿐이었지만, 13년이 지난 후에는 250명당 1대로 늘어났다. 1907년에는 14명당 1대였고, 1920년이 되자 전채 가구의 3분의 1이 전화기를 보유했다. 전화가 점점 보편화되면서 지역사회별로 자체적인 전화 체계를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화가 지역사회 연결에 희망을 불러일으키자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드디어 마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