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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정은 Aug 28. 2020

기술은 고독을 낳았나요?

루크 페르난데스, 수전 J. 맷 -『테크심리학』서평

우리에게 세상은 너무 벅차다. 인간 세상은 특히 더 그렇다. 가장 바람직한 우정조차 신경성 활력을 고갈시키고, 피로와 고통을 불러온다. 고독을 갈망하는 마음은 사교성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다. 사교성도 너무 오래 또는 지나치게 열심히 몰두하다   보면 짜증이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p.145(리디북스 기준)


책은 상당 부분 외로움을 기술과 엮어 말하고 있다. 외로움을 기술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그 둘의 성격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종류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외로움이라는 큰 대목 아래에 전통적인 외로움과 현대의 외로움, 이것은 외로움의 발전이 아니라 또 다른 외로움의 탄생인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외로움은 기술이 낳은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형상이며 그렇기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외로움의 두 형상은 동시에 찾아올 수 있다. 그럴수록 인간은 기술과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데 만약 이 둘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상황에서 주변이, 내가 만족하다고 느끼지 못하다면 언제든 외로움은 우리의 곁에 찾아올 것이다.



1787년 9월, 동네 선술집에 있다가 집에 돌아온 그녀는 "7시 반쯤 집에 돌아왔는데, 여기는 깜깜하고 외로운 곳이다."라며 그런 환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방 안을 서성거리며 아프도록 울었다. 내 마음이 신의 다스림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자신의 '홀로 됨'을 신의 뜻으로 알았다. "나를 돌보는 것이 신의 뜻이다. 내 자존심을 치료하고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는 곳은 그분의 품뿐이다."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역경, 고독과 소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런 환경이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구원은 무엇이기에 인간의 고통의 한 영역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사실 종교가 없는 나도 신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인간이 해낼 수 없을 만한 고통의 일을 해내야 할 때, 개인의 존재를 한없이 작게 만들 때, 인간은 가끔, 노크할 여력도 없이 종교와 국가를 뛰어넘어 모든 신을 부른다. 이 정도만으로 생각했을 때도 신은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여긴다. 그렇다면 종교에 확연한 목소리를 믿는 신앙자들은 고독과 소외와 역경과 고난과 소외와 외로움보다 더 큰 고통을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걸까. 구원은 무엇일까. 지옥에 가지 않는 것? 지옥은 그 가여운 감정들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혹은 괴로움이고 즐거움이고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구원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일까.


미국인들이 개인주의 때문에 외로움에 더 노출되었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사회적, 가족적 유대를 유지하기보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의 길을 걸었고, 그로 인해 자유를 얻었지만 잠재적 고독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조상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후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동시대 사람들로부터도 고립시킨다. 개인은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마음에 갇힐 위험이 있다."


흔히 개인주의라 하면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 쉽다. 개인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단체나 공동체보다 자신의 권리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단체에서 벗어난 구성원을 수호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단체는 절대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개인주의는 이기적인 것과 다르다. 개인주의도 충분히 이타적이며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권리도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고독하거나 외로움을 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나 주변에 자신을 노출하게 되는데, 1대 1의 상황뿐만 아니라 2대 2의 상황에서도 타인을 그리워하고 의지한다. 그러니까 개인주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맞지만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것은 주변(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인들이다. 그러니 책의 문장처럼 하나의 목소리는 늘 누군가를 기대하고 그리워하며 고대할지도 모른다. 외로움이라는 건, 부조리한 목소리들로 나를 집단으로 밀어 넣어 희생시키려 할 때, 개인주의가 된 사람에게 견디지 못할 아픔을 준다.



우리 모두는 고독의 섬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모가 모두 그 섬에 살았고, 그분들의 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 모든 사람은 고독을 안고 산다. 지구 상에 수백만 명이 살고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고독하다. 그 누구도 영혼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각자는 고독한 방 안에 감춰져 있다.



이토록 책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역사적으로 쫓아가며 추적하는 이유는 기술 탄생 이전의 외로움과 기술 탄생 이후의 외로움이 같은 형상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기술 탄생 이전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시절, 많은 신학자들은 외로움이나 고독이 인간의 타락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는 걸 강조했다. 그리하여 19C 많은 인간은 종교에 복종했고 누군가 나를 지켜준다는 마음 하나로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랬다고 모든 사람이 종교나 기술에 기대 외로움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거나, 그 둘로 인해 모든 외로움이 탄생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점점 외로움을 이용했다. 사실 이 뒤에 나올 전보나 우편, 전화 등이 외로움에 의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사용하려고 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자본에 의해 놀아나지 않고 감성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통신 매체로 사용되었던 것들이 정보를 전달하거나 급한 용무를 회신하는 양만큼이나 서로의 안부나 안위를 묻는 것이 늘어나며 '우편-전보-전화-문자-대화 어플'로 발전했다. 때문에 그들의 감성을 깰 만큼 '돈'이라는 수단을 끌여놓았던 전보는 무너진 것이다.



전보는 보내는 데 돈이 많이 들고, 낯선 사람들과 연락하는 수단인데다, 시끄럽고, 마을과 교회, 주택에 위험, 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전신 선로까지 가설해야 하니 뭐가 좋았겠는가? 외로움에 빠졌지만, 전보가 해결책이라 여기지 않았다.

                                                                                  p.137



편지는 낭만을 담았지만 편리성과 거리를 추구하던 전보는 결국 세계화에 도달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전보를 옹호한 사람들도 전선 아래로 전보를 끌어내렸다. 책에서는 '전보'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들여놓는다. 그것도 '지역 주민 인증 맛집'이라는 도장을 찍은 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의 불편사항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말이다. '전보'에 대한 열거는 매우 따갑다. 사실 통신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보를 반가워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단어는 귀에 익은데 직접 하거나 받아본 이들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전보가 나올 당시 사람들의 문명이 그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저자의 말대로 1866년, 뉴욕에서 런던으로 10 단어를 보내는데 5~6달러라니. 편지의 낭만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외로움을 깨우치지 못하고 소음과 돈의 우울에 갇힐 수밖에. 돈 없으면 연락도 못하다니, 도끼를 들고 전신주를 쓰러뜨렸겠지.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것도 아닌데 6달러나 내라니.







미국인들이 처음에는 전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결국 대다수가 받아들였다. 전화가 발명되고 4년이 지난 뒤인 1880년에 미국인의 전화기 보유 대수는 1000명당 1명뿐이었지만, 13년이 지난 후에는 250명당 1대로 늘어났다. 1907년에는 14명당 1대였고, 1920년이 되자 전채 가구의 3분의 1이 전화기를 보유했다. 전화가 점점 보편화되면서 지역사회별로 자체적인 전화 체계를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화가 지역사회 연결에 희망을 불러일으키자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드디어 마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보 때문인지 사람들은 잠시 기술에 마음을 주지 않다가 꽤 유용한, 그리고 정책적인 방향으로 인해 '전화'에 홀렸다! 이 책의 방향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어쨌든 그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사람은 고독과 싸우기 위해,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 나온 기술을 이용하려고 하는 점이다. 전보나 우편이나 전화는 인간의 고독이나 외로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기술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그 와중에도 자본과 시간의 효율성을 따져가며).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던 책 속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책에 따르면 작업을 하는 하루 중 단 몇 시간뿐, 그 외에는 인간은 혼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아니더라도 책과 휴대폰, 음식, 티브이, 동물, 식물 등 사람은 항상 무언가와 함께 하고 소통하려는 시도를 한다. 결국 외롭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영원히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 무슨 일을 끝내기 위해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지금부터 들어갈 외로움은 '약속'으로 인한 만남과 대화로 그것을 잊기 위한 발버둥이다. 책이든 가족이든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렇지 않으면 앞선 미국인들의 개인주의에 대한 챕터처럼 자기 안에 갇힐 수도 있다. 외로움을 외롭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의 상태로.



책을 읽기 전까지, 사람은 먼 곳에서 멀어질 때, 고독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주요하게 읽은 챕터에서는 결국 거리와 상관없이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시끌벅적한 곳에서는 1-2시간의 고독을 원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그건 고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함을 필요로 할 뿐. 고독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그것은 동물도 식물도 세균까지도 마찬가지인데. 위협에 순간이 아니고서야 1대 1보다는 2대 2가 덜 외롭다고. 고독은 고상하지 않다고. 고독은 우아하지 않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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