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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정은 Oct 23. 2020

거리의 심리학

세라 로즈 캐버너, <패거리 심리학> 서평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간절히 원한다.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갈구하고, 원대하고 감동적인 진실을 원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진실하고 확실한 것들을 갖춘 조직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반항자와 이단자가 생기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바람이 깊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가 훨씬 더 만족스럽다.”(47%)

서평에 들어가기에 앞서 책의 주요 키워드를 알아보자!

책 주요 키워드: 꿀벌, 하이브 마인드


“정서도 대면 접촉과 온라인, 모두를 통해 확산된다. 사회적 타자와 정서를 공유하면 당신만이 아니라 그 타자도 감정적 반응이 더 뚜렷해질 수 있다.”(12%)
“우리 자아는 허구”(15%)
우리가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며 점점 더 큰 집단을 형성해가자 문화가 잉태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가장 먼저 구축한 것은 ‘공종의 상호작용(sheared intention)”
(18%)

이 책을 잘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중요한 여부가 아니다. 다만 책의 많은 부분 중 어떤 문구가 자신의 눈에 들었는지 혹은 어떤 부분을 정리했는지를 말하는 것이 권장하는 독서법이다. 개인이 이 책을 읽으며 책의 상반부에 가장 크게 느낀 요약은 자아는 혼자 형성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상대방과 소통을 통해서 활발한 작용이 일어난다. 이제부터는 개인의 차례이다. 개인은 저자의 말을 빌려 내 생각을 드러낸다. 때문에 공통적이고 대다수적이고 보통과 일반적이라는 말에 동요하는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소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럼 그 안에서도 내 목소리를 내고 잘못된 점을 꼬집는 사람은 두 부류이다. 애초에 군중에 들어오기를 거부한 사람과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 나의 다름과 그들의 존재를 구분하는, 사소하고 공통적일 수도 있는 부분에까지 예민하게 촉각을 세운다.


우리의 자아는 허구라는 것에 별 이견 없이 순순히 반응하고자 한다. 우리가 아니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의 존재가 '나'임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경우를 예로 들자면,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차이를 말하는 사람,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나를 나타내거나 드러내지 않는 사람. 그러나 자아는 허구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자아를 발견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아는 고정될 수 없다. 내 성격이 이렇다는 것과 내 자아는 항상 불편해라는 건 다르다. 자아는 계속해서 자리를 옮기고 나를 좋아했다가 싫어하고 저 애가 밉다가 그립다. 자아는 허구다. 그래서 남들은 사람을 변덕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인간을 정의하고 자아를 설명하는 것 중에 가장 그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테크놀로지의 두 번째 장점은 우리에게 일상의 삶에서 접촉할 수 없는 공동체들을 온라인으로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는 많은 이유로 공백을 메워준다.(30%)


공백을 메운다는 건 어떤 걸까.
아마 예민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겨울에 찬바람이 불 듯
시리게 느끼는 거겠지.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그렇지 않다. 온라인에서는 멀리 떨어져서도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리면 모욕을 가할 수 있다. 게다가 표적이 컴퓨터에서는 아바타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욕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런 변화로 분노가 분노를 낳고 사람들이 더욱 방종할 거라고 염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트위터에는 ”그런데 오늘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거지?“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기지 않았는가.”(33%)


“우리는 내집단보다 외집단에 속한 사람을 비난하며 그를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많은 연구에서 밝혔듯이, 일시적으로 좌절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헐뜯게 되고, 죽음의 공포가 심화되면 내집단의 결속력(예: 애국심)이 강화되고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예: 외국인 혐오증)이 격화된다.”(38%)


심리학 종류와 실험, 수업 시간 혹은 학자들과의 이야기, 자신의 연구를 뒷받침으로 들며 주장(정서, 꿀벌, 하이브 마인드, 중독, 우울, 협력, 기억, 이야기 등)이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대중의 심리를 파악하고 개인의 심리를 녹여냈다. 사실 그 외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아쉬운, 부분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책에서 나왔던 말과 상관 지어 사회적 문제를 다뤄보고 개인의 생각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을 꼬집는다. 단연 개인의 생각이니 크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음을 미리 고지한다.


이 책의 안 좋은 점: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오류는 없고 자신은 깨우친 척한다는 것과 소 챕터의 제목과 내용이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온갖 혐오 발화와 사상들에 대해 자신은 알고 있는 정도를 뽐낼 뿐, 책 속에서도 있는 몇몇 단어들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거추장스럽다. 혹여 작가는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번역가가 단어를 혼동하여 사용하였다면 사과의 뜻을 표한다.

“왜 어떤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견뎌내고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악몽의 숲에서 방향을 잃고 위협에 과민하게 반응하면 그 후에도 끝없이 트라우마에 시달릴까?(54%)


그건 아마 ‘취약한 사람’이라는 챕터의 제목과 상관 짓자면, 아픔은 취약함이 아니다는 것과 그런 관점에서는 그 누구도 이 챕터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음을 작가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 진정으로 중요한 예술가와 사상가는 소수에 불과하고, 집단의 의견을 전달하는 중계인들만 무수하다는 의견에 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의견에는 몰상식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편견이 담겨있는 듯하다. 또 진지한 에술가는 사회규범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고, 개인적인 충실성, 성교 전 동의 등 사솔한 것이란 이유로 모든 관심을 무시한 체불 꽃처럼 앞장서야 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가 개인의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추구한다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71%)



항상 이 관점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왜냐면 사람마다 예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집요한 책임감과 의무를 짊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술가를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예술가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내가 보기에는 예술가는, 많은 사랑을 받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영향을 주는 사람은 분명함에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선 하나를 그릴 때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와 같은 경우에는 글을 쓰기 전 소재에 대한 고민을 할 때, 이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혐오 발화나 실수를 최대한 줄이고자 미리 피해야 할 말을 생각한다. 왜냐면 이 말로 인해 내 작품을 기대하고 왔을 독자와 내 글로부터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까지 파해를 겪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 경제적 이득을 취하지 않아 직업이라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예술가이다. 고로 나의 한 마디가, 한 단어의 선택이 누군가를 기쁘게 울릴 수도, 분노 롤 울릴 수도 있다 생각하며, 글을 쓰기 전과 쓸 때와 쓰고 난 이후, 엄청 난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쓴다. 그렇다면 실직에 있는 작가들은 덧없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부디 이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즘 젊은이들을 눈여겨보면, 부당한 순응을 거부하면서도 함께 공존하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듯하다.”(83%)


서양의 문화를 선진국이라며 쉽게 받아들이던 때는 끝이 났다. 서양은 서양이고 한국은 한국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서양이 '서양'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지역이 어디든 재미있고 유익한 무언가가 있으면 즐기고 그러다 문득 궁긍해져 알고 보니 그 콘텐츠의 발상지가 서양이었다. 정도? 예전 같으면 그럼 본토에 가봐야 지였지만 또는 그 나라가 발상 지니까 최고겠지 이렇게 생각했지만 요즘은 그 문화를 그냥 내가 서있는 곳에서 내 멋대로 해낸다. 그것이 요즘 시대이다.


“해독제를 복용하라: 감정을 조절하라. 첫째로 두려움을 멀리하라.(..) 둘째로는 희망의 꽃의 활짝 펴라(..) 셋째로는 분노를 이용하되 분노에 사로잡히지는 마라.”(83-84%)


예민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중과 집단, 대기업의 심리에 놀아나지 않고 나를 다독여야 한다. 타인의 말에 쉽게 휘둘릴 수밖에 없고, 분노할 일들만 생기지만 나를 다독여 그들에게 날카로운 침을 부드럽게 쏴야 한다. 그럼에도 듣지 않는다면 있는 힘껏 힘을 내 분노하겠지만, 분노할 일밖에 없는 세상에서 처음 대면한 분노와는 냉정하게 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니까. 우리는 개인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없으니까. 개인의 목소리에 아직 힘 있는 '대중'을 이끌어 세상에 알려야, 그래야 내 음정이라도 내보일 수 있으니.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메워가며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키워가지 못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방식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훨씬 더 각박하게 살았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교류하라. 진영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보라.”(83%)


이거는 정말 간곡히 원한다.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제스처를 그에게 보이느지까지도.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던 시대는 이제 '차별-인지-분노-시위(목소리)-변화-정착-새로운 차별 발견'의 단계에서 분노와 목소리 사이에서 힘을 내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은 사실 그를 토대로, 나는 그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상황에 빠질 자신을 상상하며 공감한다는 내용이다. 함부로 공감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그들을 위한다면 많이 듣고 많이 겪으며 그들을 많이 만나봐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의 차이는 메우지 못할지 언정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공감'을 하게 된다.


“구역질 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의 견해도 어둡고 축축하며 숨겨진 곳에서만 자라고 번창합니다. 따라서 그의 견해가 환한 곳에 나와, 더 나은 견해와 경쟁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햇살이 최고의 살균제이니까요. 세상에 노출되고 보여서, 분석되고 조롱거리가 되면 그런 견해가 자연스레 힘을 잃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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