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홍보합니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공공기관 홍보팀에서 근무한 내 경력은 정말이지 별 쓸모가 없었다. 보도자료? 거의 손도 대보지 못했다. 연구자가 연구 내용을 축약해 원문을 작성하면 홍보팀에서 윤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기업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것조차 해본 적이 없다. 기자 대응? 보도자료는 정부 부처를 통해 배포됐고, 말단인 내가 기자를 응대할 일도 없었을뿐더러 미팅 자리에 따라가서 만난 메이저 신문사의 기자들은 모두 젠틀했다. 사기업이 아니라서인지 크게 얼굴 붉힐 일도 없었다. 보고서 표지 개편? 프린트와 인쇄의 차이를 알게 됐고, 연구자들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나마 페이스북 운영이나 유튜브용 영상 제작 같은 일들이 당시의 '요즘 세상'에 맞는 경력이었지만 퀄리티는 민망한 수준이었고 개인적으로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별 밑천이 없는 상태로 B2B IT 회사에 홍보 담당자로 입사하게 됐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상태인데, 전임자도 인수인계받을 자료도 없으니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도 모르겠다. 임원을 통해 모회사 홍보팀으로부터 기자 리스트를 공유받았지만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워드 파일이라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결국 맨땅에 헤딩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언론 모니터링, SNS(블로그와 페이스북), 사내 이벤트 등 당장 빠르게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손대며 조금씩 적응해나갔다. 부서나 부서장이 없으니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며 일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점점 협조를 요청해야 할 일이 많아졌지만 공공기관에서 구르고 왔더니 나도 모르는 새에 사회적 철판 탈부착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내향형 외길만 걷고 있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제법 두꺼워진 것이다.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들이대니 조금 느리고 삐걱거릴지라도 어쨌든, 어떻게든 굴러갔다.
어느 정도 기초를 잡아놓고 본격적인 언론관계 구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언론사 대표번호로 전화할 때면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기자들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은 의외로 별일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회사의 서비스가 B2B IT 중에서도 좁고 깊은 영역에 속해 있어서 아무리 공부해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홍보 담당자인데 회사의 비즈니스를 자신 있게 설명할 수가 없으니 미팅을 잡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집착하는 대신,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본 결과 IR 미팅에 동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IR 담당자의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애널리스트들과의 Q&A는 문서보다 훨씬 유용했다. 여의찮을 때는 세일즈 담당자들을 졸라 여러 번 설명을 들었다. 애널리스트나 고객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는 것을 여러 번 듣고 공부하며 내 식으로 만드니 완벽하지는 않아도 한결 나아졌다. 이렇게 무장한 후 드디어 기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기자미팅을 시작한 초반에는 임원분이 동행해줬지만 이내 혼자 다녀야 했고 혼자 다닐 수 있었다. 내가 만난 B2B IT 분야의 기자들은 상식선에서 말하고 행동했으며 무엇보다 나이스했다. 대부분 일대일로 만나기 때문에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만큼 빨리 가까워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연륜이 있는 기자들은 나를 어떻게 써먹어야 좋은지 귀신같이 파악했다.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업 특성상 회사에는 전혀 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기자들이 좋아할 만한 정보가 종종 있었다. 취재가 막힐 때면 전화가 걸려 왔고, 다른 부서의 담당자를 통해 확인한 후 적당한 선에서 알려주면 서로 윈윈이었다.
이건 좀 나중의 얘기고, 홍보를 막 시작했을 때는 아는 것만 정확히 알려준다면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건 수위를 조절해서 말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한 후 확인해서 알려주면 된다. 어차피 그들도 업계에 갓 발들인 나에게 완벽한 지식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만 말자.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으로 시작해 차차 시간이 지나며 업계 동향을 나눌 수도 있게 됐다. 세일즈나 엔지니어와 이야기하며 귀동냥한 이야기들은 큰 도움이 됐고, 가벼운 미팅이 긍정적인 기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때로는 회사의 대외 비즈니스 담당자에게 부탁해, 복잡한 정부 정책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몇몇 기자들을 모아 단출하게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다른 곳에서는 설명을 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었다.
사업 내용이 어렵고 복잡하며 뒷단에 존재하고 있어 기자들조차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었다. 7년 동안 부정 기사가 단 한 건도 없었고, 보도자료에 대한 태클도 없었고, 회사를 뒤집어놓을 [단독] 기사도 없었다. 평화로운 일상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홍보 담당자로서 부정 기사에 제대로 대응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직을 준비하며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이기도 했다. 한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도 부정 기사에 대한 질문이 발목을 잡았다. 물론 내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다른 회사의 홍보 담당자들과 이야기할 때면 오히려 부럽다며 이직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편한 곳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있는 셈이다. 부실한 '맷집'과 이로 인한 경력 고민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른 건 몰라도 보도자료만큼은 잘 쓰려고 노력했다. 가끔은 세일즈나 기술 부서에서 초안을 써주기도 했지만 95% 정도는 직접 써야 했다. 일반적인 보도자료 양식에 따라 어느 정도 콘텐츠의 틀을 잡아놓은 후 담당자와 회의실에서 만나 설명을 들으며 내용을 채워나갔다. 개발자나 엔지니어와 미팅할 때는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었다. 붙들고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에 조금은 질려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기술 위주의 보도자료가 많았기 때문에 흥미보다는 기본에 충실해야 했다. '사실과 틀리지 않을 것',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쓸 것', 그리고 '국어에 신경 쓸 것'을 목표로 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알맞은지, 주술이 일치하는지, 목적어가 생략되거나 틀리지는 않은지 늘 확인했다. 어휘 선택에도 공을 들였다.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조금 더 진취적으로 보일지, 혁신적인 느낌을 줄지, 그리고 경쟁사에는 없는 장점을 은근하게 돋보이게 할지 생각하며 퇴고했다. 배포 전 임원진에 공유하기는 했지만 피드백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타를 포함한 모든 실수를 어떻게든 발견해 고쳐야 했다. 미처 보지 못한 오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스트레스이자 원동력이었다.
글이 막힐 때면 업계 상위 대기업의 기사나 보도자료를 확인했고, 특히 지면 기사 위주로 참고했다. 한겨레교육의 기자 직강 글쓰기 교육도 도움이 됐다.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어떻게든 직원들을 모델로 섭외해 사진을 함께 내보내려 애썼다. 최고 수준의 보도자료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간은 가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렇게 오래 다닐지도 몰랐고 또 이렇게 오래 혼자 일하게 될지도 몰랐지만 결국 7년 내내 ‘혼보’의 길을 걸었다. 이것이 특별히 열악한 조건은 아니다. 업계나 사업 특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소기업은 물론 중견기업 중에도 홍보 담당자가 아예 없거나 나처럼 단신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나 임원이 홍보에 관심이 많(지만 이해도가 낮)다면 더욱 피곤해질 수 있다. 반면 홍보에 관심이 없거나 ‘알아서 해라’ 모드라면 편하면서도 외로울 것이다. 나는 명백하게 후자였기 때문에 보도자료도 기자미팅도 내 마음대로 하며 책임과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사내에서 전문적인 피드백이나 코칭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은 아쉬웠다. 내 경우는 네트워킹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 같다. 기자들과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토론이 포함된 마케팅 교육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홍보 담당자들에게 의견을 구하며 조금이나마 보완해나갔다.
이직한 곳도 신생 부서가 이제 막 홍보와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단계였고 ‘혼보’로 합류하게 됐다. 업무와 환경이 비슷하니 고민도 비슷하다. 잘 짜인 조직에서 업무 분장을 통해 체계적으로 일을 배우지는 못했기 때문에 '넓고 얕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단계에서 혼자 이것저것 시작할 수는 있지만, 이미 다수의 팀원으로 구성된 부서에 들어가기에는 경험의 깊이가 연차 대비 부족하다. 다음 이직 역시 또 비슷하게, 맨땅에 헤딩하는 혼보의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업계의 특성도 조금은 있는지 얼마 전 소개받은 동종업계의 홍보 담당자분(역시 혼보)도 같은 이야기를 하며 매우 공감했다. '혼보'가 계속된다면 내 경력의 끝은 어디일까. 10년 차쯤 되면 좀 더 명쾌한 길을 걷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고민에는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