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말이 오가는 곳. 그러나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는 ‘말'이 없다.
연말이 되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많은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분과별로 나뉘어 지난 1년간의 교육 활동을 되짚고, 불편했던 점이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허심탄회하게 나눈다. 수업 방식부터 생활지도, 학부모와의 관계, 동료 간 소통까지 다양한 주제가 올라온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고민을 말하고, 누군가는 경험을 덧붙인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학교는 조금씩 나아간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며 학교의 변화는 결국 '말하는 문화'에서 시작된다는 걸 체감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 학교의 벽은 너무도 높다. 어느 학교의 좋은 시스템이나 교육 노하우가 옆 학교의 담장을 넘지 못한다. 그러니 민주적으로 잘 운영되는 학교의 경험이 다른 학교로 전파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각 학교는 제도적으로는 하나의 체계 안에 있지만, 실제로는 제각기 고립된 구조 속에서 운영된다. 그래서 대화와 실험이 일어나는 학교의 흐름이, 다른 학교에서는 여전히 낯설고 요원한 일이 되어버린다.
특히 일부 지방의 비민주적 문화가 남아 있는 학교에서는 연말 회의뿐만 아니라 평소 회의조차 형식에 그치기 일쑤다. 회의는 열리지만, 말은 없다. 침묵이 흐르고, 의견을 내는 대신 눈치를 본다. 질문도, 제안도, 비판도 쉽게 꺼내지 못한다.
형식만 갖춘 회의는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학교는 한 해가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마치 '문제가 없어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말하지 않아서 조용한' 분위기다.
그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나는 그 이면에 교사 인사제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는 순환 근무나 조직 내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며, 변화의 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일부 지방 학교에서는 '지역 만기', '학교 만기', '시 만기', '군 만기' 등 여러 규제가 있는 동시에, 본인이 원할 경우 같은 지역 내에서 언제든지 학교를 옮길 수 있다.
학교 내 갈등이나 불편함이 생기면,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떠나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문제를 안고 함께 풀기보다, 문제를 피해버리는 문화가 고착되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지방 교육에서는 교사들에게 점수를 매겨 인사이동에 반영하는 구조가 있다. "어느 군은 몇 점", "어느 시는 몇 점". 이 점수는 교사의 수업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은 좋은 점수를 받아 더 편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물론, 낙후된 지역에 우수 교사를 배치해 교육 격차를 줄이겠다는 정책적 의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이 제도가 종종 개인의 안위나 승진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교육 현장에서 '토론 없는 문화'는 단순히 연말 한 번의 회의가 형식적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교사들이 모여 학급을 어떻게 운영할지, 수업 방식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도와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질은 자연히 제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학부모나 지역사회와의 소통, 소규모 학교가 가진 고질적인 어려움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문제를 꺼내지 않고, 아무도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학교는 점점 무기력한 공간이 되어간다. 학생이 주인공이어야 할 공간이, 그저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직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대화가 사라진 교무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초부터 교무실에는 교사 책상마다 높다란 파티션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교사들은 옆자리 동료와 얼굴도 잘 안 보이고 점점 대화하지 않게 되어갔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앞에 앉아 보내며, 조용한 교무실은 더 이상 소통의 공간이 아닌 각자의 작업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한 잔의 커피를 사이에 두고 나누던 선배 교사의 노하우 대신, 이제는 대부분 네이버 같은 검색 도구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렇게 학교 안의 '말하는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침묵과 단절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 침묵의 원인 중 하나는, 일부 지방 학교 관리자들이 가진 강한 권위 의식도 한몫한다. 비판이나 다른 의견을 불편해하고, 교직원 간의 수평적 대화보다는 위계와 지시로 운영되는 문화는 결국 교사들의 입을 닫게 만든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고, 관리자 역시 그런 '조용한 교무실'을 선호한다면, 변화는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학교는 행정 조직이 아니라, 교육 공동체여야 한다. 관리자 역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통의 문을 열어야 한다.
교사라는 직업은 학생을 중심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드시 '대화'와 '토론'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의견을 꺼내는 일은 쉽지 않다. 때로는 조직 안에서 '불편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그래야 학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방 학교가 진정으로 변하려면, 사람의 순환만큼이나 '말이 오가는 문화'가 필요하다. 문제가 있어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공간에서는 학생도, 교사도 자랄 수 없다. 조용한 교무실은 편할지 몰라도, 교육에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좋은 학교는 늘 그런 대화의 연습 속에서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