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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외환위기,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로 끝났을까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달러가 사라진 날”의 배경을 되짚어 보면


1997년 겨울, 한국 사람들의 일상 언어에 낯선 단어가 등장하였다. IMF, 구조조정, 외환보유액, 달러 고갈 등.


은행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고,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원/달러 환율 급등”이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 많은 분들에게 외환위기는 곧바로 ‘한국의 위기’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위기는 서울에서 시작된 사건이 아니었다.


1994년 중국이 단 한 번의 환율 카드로 세계 무역 지형을 흔들었고, 1997년 여름 태국 바트화가 무너지며 ‘톰얌쿵 위기’가 촉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홍콩은 금리 300%라는 극단적 방패로 헤지펀드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도미노가 한국이었다.


1. 중국의 ‘8.7 환율 레버’: 무역 지도를 바꾸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은 덩샤오핑-리펑-장쩌민으로 이어지는 권력 재정렬 속에서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지역부터 달려라(선부론)”를 국가 전략으로 택하였다. 그 실행무대가 바로 해안 수출기지 전략이었다.


1979년 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 4대 특구

이후 14개 연해개방도시 지정

외국 자본, 가공무역, 각종 실험 제도를 해안 지역에 먼저 몰아넣는 방식


그런데 이 전략에 ‘마지막 퍼즐’이 남아 있었다. 바로 환율이다. 1994년 1월, 중국은 기존의 이중환율 체제(공식환율 vs 스왑시장 환율)를 하나로 합쳤다. 그때 레버를 맞춘 숫자가 달러당 8.7위안이었다.


통합 전 공식환율: 1달러 ≒ 5.8위안

스왑시장(사실상의 시장환율): 1달러 ≒ 8.7위안

통합: 스왑시장 쪽(8.7위안)을 선택 → 공식환율 기준으론 약 50% 절하 효과


즉, 같은 장난감 1개를 수출해도, 예전엔 5.8위안을 받았는데 이제는 8.7위안을 받게 되었다. 달러 가격은 거의 그대로인데, 위안화로 벌어들이는 돈은 확 늘어난 셈이다.


이 결정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중국 제품의 달러 가격 인하다. 의류·장난감·가전·가죽제품 등 노동집약적 품목의 수출가격이 국제 시장에서 한 단계 내려가면서 가격 경쟁력이 급상승한 것이다. 둘째, 정책 방향의 ‘정렬’이다. 특구·개방도시에서 이미 돌아가던 가공무역·외자 유입과 환율, 수출 드라이브 전략이 한 방향으로 맞춰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으로 갈수록 중국의 수출 곡선은 가파르게 치솟았고, 비슷한 품목을 수출하던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는 점점 밀리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부터 아시아 외환위기의 첫 장면이 조용히 열린 셈이다.


2. 태국 톰얌쿵 위기: 고정환율(Peg)과 단기 외채의 덫

중국이 값싼 공산품으로 세계 시장을 파고들던 시기, 동남아는 “아시아의 기적”이라 불리던 고성장 구간이었다. 당시 태국의 성장률은 연 8% 안팎이었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역시 7~9%대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성장의 엔진은 역시 수출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환율제도였다. 태국은 1984년부터 1997년 7월까지, 1달러 = 25바트 수준의 고정환율제(Peg)를 유지하였다. 겉으로는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환율 절하 이후, 노동집약적 제품의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면서 태국 수출이 서서히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수출이 줄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출 감소 → 들어오는 달러 감소 → 무역수지 악화(수입 > 수출) → 외환보유액(달러 비상금) 감소


여기서 고정환율의 역설이 등장한다. 시장에서는 바트를 팔고 달러를 사려하기 때문에 바트 가치가 떨어지려는 압력이 거세다. 그러나 정부는 “1달러 = 25바트”를 고수하기 위하여 중앙은행이 시장에 달러를 풀어 바트를 사들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외환보유액이 빠르게 줄어들게 된다. 즉, 수출이 마르면, 방어용 달러부터 마르게 되는 것이다.


1997년 7월 2일, 결국 태국 중앙은행은 고정환율을 포기하고 변동환율제 전환을 선언한다. 그날 바트화는 단 하루 만에 20% 가까이 폭락하였고, 이어 몇 달 사이에 가치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문제는 환율만이 아니었다. 태국 기업들의 외채 구조가 더 큰 폭탄이었다.


그 결과로 기업 부도가 확대되면서 은행 부실화도 같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은행 위기로 이어졌고, 해외 자금이 빠른 속도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동남아 주변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통화까지 “같은 위험 그룹”으로 묶이면서 연쇄 타격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고리가 있다. 바로 일본 은행이다. 1990년대 일본 은행들은 동남아에 대규모로 달러를 빌려주었고, 아시아 위기로 해당 대출이 흔들리자, 일본 당국은 BIS 비율(은행 건전성 규제) 강화를 요구하였다. 이에 은행들은 자본을 늘리기보다 대출 회수(디레버리징) 전략을 선택하였고, 그 자금 회수의 파장이 한국 종금사와 대기업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태국 바트 폭락 → 동남아 전역 위기 → 일본 은행 디레버리징 → 한국 유동성 위기라는 도미노 경로가 만들어진다.


3. 홍콩의 300% 금리 방어: “환율 대신 시간을 공격하라”

태국이 무너진 뒤, 헤지펀드는 다음 표적을 찾는다. 조건은 단순했다. 고정환율제(페그)를 유지하고 있고, 외환보유액에 한계가 있을 것 같은 나라. 당시 그들의 눈에 들어온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은 커런시보드(Currency Board)라는, 더 강한 형태의 고정환율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달러당 7.8HKD 수준으로 페그, 시중 통화량만큼의 달러를 1:1 이상 보유해야 하는 제도로 이론상으로는 “무너지기 어렵다”고 여겨지지만, 헤지펀드는 오히려 이 점에 주목하였다.


"방어를 위해서는 엄청난 달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달러는 결국 한정되어 있다.”


공격 방식은 태국 때와 비슷하였다. 홍콩달러(HKD)를 빌려서 그것을 팔고, 달러(USD)를 사서 HKMA(홍콩금융관리국)가 방어를 위해 달러를 내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외환보유액이 줄어들면 페그를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홍콩은 전혀 다른 무기를 꺼낸다. 환율이 아니라, 금리였다. 1997년 10월, 홍콩 단기금리(HIBOR)는 하루 사이에 연 300%까지 치솟았다. 홍콩달러를 빌려 공매도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하루가 다르게 천문학적인 이자를 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결국, 많은 포지션이 강제 청산(숏 커버)되면서 홍콩달러 수요가 늘어났고, 홍콩 페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항셍지수 급락, 부동산 가격 급락, 그리고 글로벌 증시 변동성이 확대(미국 증시 서킷브레이커 발동 등)되었다.


홍콩은 환율을 지키는 대신, 자기 경제와 세계 금융시장에 충격을 나눠 떠안는 선택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리 방패로 페그를 지켜낸 유일한 사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4. 한국 IMF 위기: 짧은 외채·만기 미스매치·거버넌스의 3종 세트

홍콩의 방어전 이후, 불길은 한반도로 번졌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은 꽤 탄탄해 보였다. 고도성장을 거쳐 OECD에 가입하였고, 대기업(재벌) 중심의 수출·제조 경쟁력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자금 조달 구조를 뜯어보면 취약한 지점이 분명했다.


① 종금사 급증과 단기 외화차입 경쟁

1994년 ‘금융선진화’ 이후 종금사(종합금융회사)가 6개 → 30개로 급증하였고, 많은 종금사가 단기 외화를 차입하여 이를 국내 장기대출로 스프레드를 벌리는 모델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재벌 계열사 위주의, 서로 얽히고 얽힌 거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싸게 빌려 비싸게 빌려준다”는 단순한 이익 구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빚은 짧게 빌리고(단기), 돈은 길게 빌려주었다(장기). 그리고 외국은행에서 만기마다 계속 롤오버(연장)를 해줘야 유지되는 구조였다. 쉽게 말해, 1년짜리 대출을 계속 새로 빌려서 5년짜리 대출을 내주고 있는 상태인 것이었다. 그러니 중간에 누가 “더는 못 빌려줘”라고 말하는 순간, 전체 구조는 멈춰 버릴 수밖에 없었다.


② 일본 은행의 대출 회수와 글로벌 신용 경색

앞서 태국·동남아 위기로 타격을 입었던 일본 은행들은 BIS 규제 강화로 인해 위험자산부터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외국 은행이 만기연장(롤오버)을 거부하자, 한국 금융기관은 “당장 갚아야 할 달러”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상황에 놓였다.


③ 유동성 크런치와 IMF 요청

해외에서 들어오는 달러가 막히자 국내에서는 “위험하다”는 소문으로 예금 인출이 이어지고 정부·한국은행이 외환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풀면서 외환보유액이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IMF에 공식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뉴욕 연방준비은행 회의실, 이른바 ‘뉴욕의 방’에서 열린 협의에서 글로벌 채권은행단은 한국 단기채권의 만기연장(롤오버)과 중장기 전환에 합의한다.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이다. 한국을 살린 것은 ‘막대한 새 돈’이라기보다 기존 빚의 시간을 늘려준 것이었다. IMF 패키지(공식 총 550억 달러)와 채권은행단의 집단 롤오버 덕분에 한국은 숨을 돌릴 시간을 벌었고, 구조조정·금융개혁·기업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2001년 조기 상환에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실업, 많은 기업의 해체·매각, 외국 자본으로의 지분 이전 등 ‘IMF 세대’라는 이름이 생길 정도의 사회·문화적 상처가 함께 남았다. 즉, 외환위기는 숫자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삶의 위기였다.


위기는 다시 오지만, 같은 형태로 오지는 않는다


아시아 외환위기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무역에서 시작된 균열이 금융으로 옮겨 붙고, 결국 국가 시스템 전체를 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 이상, 단기외채 관리 규칙, 그리고 은행 건전성 규제 등을 갖추며, 숫자상으로는 훨씬 튼튼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또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고 있다. 미·중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전쟁, 고금리와 글로벌 유동성 축소, 지정학 리스크와 자본 흐름의 급변 등이 그것이다.


외환위기는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위기를 보는 눈”을 키워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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