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공급망 현지화, 한국 기업이 마주한 새로운 조건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한동안 글로벌 제조업에는 거의 공식처럼 여겨진 전략이 있었다. 바로 'China Plus One'이다.


중국의 인건비는 빠르게 상승했고, 미·중 갈등은 단기 이벤트가 아닌 구조적 충돌로 굳어졌다. 여기에 규제 리스크, 지정학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며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중국 말고, 하나만 더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이때 동남아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다. 낮은 인건비,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 환경, 외국인 투자를 적극 환영하는 정부 정책까지.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제조기업들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으로 생산기지를 빠르게 이전하였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말로 명시되지 않은 전제가 하나 숨어 있었다.


"동남아는 정치적·산업적 요구를 하지 않는 생산기지일 것이다."


지금 이 전제는 명확히 깨지고 있다. 동남아는 더 이상 ‘조용한 대체지’가 아니다. 협상자이자 설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는 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을까


과거 동남아 국가들이 외국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교적 단순했다.

공장이 들어오면 고맙다

일자리가 늘어나면 충분하다


외국 기업 중심의 수출 확대는 분명 성과였다. GDP는 성장했고, 고용도 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수출은 늘었는데, 자국 기업은 언제 성장하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조립만 해야 하는가?

부가가치는 왜 항상 해외로 빠져나가는가?


이 질문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정치의 질문에 대한 국가의 답이 바로 '현지화(localization)'이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동남아의 현지화는 외국 기업을 밀어내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외국 기업을 활용해 자국 산업의 역할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동남아는 더 이상 ‘회피처’가 아니다. 외국 기업과 조건을 재설계하는 협상자로 변했다.


바뀐 글로벌 공급망의 질문


과거 글로벌 공급망의 기준은 비교적 단순했다.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가

납기가 안정적인가

품질 관리가 쉬운가


하지만 지금 기업이 마주하는 질문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 기업은 우리 산업에 무엇을 남기는가?

기술 이전과 인력 양성이 가능한가?

현지 기업이 공급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구조인가?


이 질문이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지만, 국가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이다. 외국 기업이 조립만 하고, 부품은 수입에 의존한 채, 이익은 본국으로 이전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그 국가는 언제까지나 조립 기지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새로운 기준이 기업의 공급 안정성 논리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오랜 시간 구축해 온 글로벌 공급망에는 품질, 납기, 보안, ESG 기준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그런데 이 기준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현지화 요구를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같은 ‘현지화’, 전혀 다른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이 흐름은 동남아 전반에서 나타나지만, 방식은 국가별로 크게 다르다. 특히 한국 기업에게 중요한 두 나라,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접근 방식이 거의 정반대이다.


① 베트남: 시간이 리스크가 되는 구조

베트남은 현지화를 법으로 즉각 강제하지 않는다. 대신 인센티브 중심의 제도 설계를 통해 기업의 선택을 유도하고 있다.

현지 부품 사용 비율↑ → 세제 혜택, 행정 절차 간소화

현지화 소극적 → 점점 불리해지는 환경


겉으로 보면 자율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명확하다.


“지금은 괜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누적된다.”


베트남의 현지화는 위법이 아닌 관리형 압박이다. 기업 입장에서 즉각적인 리스크는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다.


② 인도네시아: 조건이 곧 시장 접근권

반면 인도네시아는 명확하다. TKDN(국산부품의무화)이라는 제도를 통해 현지화 비율을 법으로 고정한다.

기준 미달 → 제품 판매 불가

공공 조달 → 사실상 참여 제한

예외 → 거의 없음


이 구조에서는 협상의 여지가 크지 않다. 인도네시아의 리스크는 진출 이후가 아니라 진입 단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부담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이 변화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작동하는 곳은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 본사가 아니다. 바로 한국의 중소 부품·소재 기업이다.


대기업은 현지 정부와 협상하며 투자 확대, R&D 센터 설립,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패키지로 묶어 시간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중소 협력사는 다르다. 현지화 압박이 커질수록 세 가지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현지로 같이 이전할 수 있는가

기술과 공정을 얼마나 공개해야 하는가

가격과 납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대기업의 ‘관리형 현지화’는 중소기업에게 거래 구조 재편 혹은 퇴출로 작동할 수 있다.


중국 이후의 전략은 ‘회피’가 아니라 ‘관리’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어디로 가면 안전한가?

어떤 조건을 감당할 수 있는가?


동남아는 여전히 중요한 생산기지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조건 없는 안전지대는 아니다. 같은 현지화라도 베트남은 시간이 리스크를 키우고, 인도네시아는 조건이 리스크를 결정한다.


중국 이후의 공급망 전략은 더 이상 도피의 문제가 아니다. 관리의 문제, 그리고 선택의 문제다. 무엇을 국내에 남길 것인가, 무엇을 현지로 옮길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끝까지 보호할 것인가.


이 선택이 개별 기업을 넘어 한국 산업 생태계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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