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는 왜 TSMC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반도체 뉴스가 쏟아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단순한 질문으로 모입니다.


“TSMC가 세계 1위라면서요? 그럼 한국도 파운드리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겉으로는 합리적입니다. AI 반도체가 폭발했고, 그 중심에 TSMC가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분기 기준으로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지배력은 더 강해졌고, 어떤 조사에선 2Q 2025 TSMC 점유율이 70% 수준까지 언급됩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한국은 “TSMC를 못 따라간 나라”가 아니라, 애초에 다른 반도체 체질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기술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출발점이 달랐고, 그 차이는 AI 시대에 더 선명해졌습니다.


대만은 왜 ‘파운드리 올인’이 가능했나


대만의 선택은 간단했습니다.


“설계가 약하고 내수 시장이 작다. 그렇다면 공장으로 승부하자.”


파운드리는 남의 설계도를 받아 정확히, 많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사업입니다. 대만은 이 한 가지 역할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아주 중요한 원칙을 쌓아 올렸습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거래 구조’입니다. 팹리스(설계 회사) 입장에서는 설계도 자체가 생명인데, 생산 파트너가 경쟁자가 아니면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AI GPU, 스마트폰 AP, 서버용 CPU까지 “최첨단 칩의 마지막 공정”이 대만으로 모입니다.


결과는 숫자로도 확인됩니다. TrendForce는 4Q 2024 기준 TSMC 점유율 67%를 언급했고, 이후에도 지배력은 더 확대되는 흐름으로 보도됩니다.


대만은 이렇게 ‘세계 공장’이 되었고, 세계는 대만의 생산 안정성에 민감해졌습니다. 즉, 대만의 강점은 “칩을 잘 만든다”를 넘어 “세계가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었다”에 있습니다.


한국은 왜 ‘메모리(HBM) 강국’으로 굳어졌나


한국의 반도체 성장 스토리는 처음부터 결이 다릅니다. 한국은 자기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제조 국가였고, 반도체도 그 방식으로 커졌습니다. DRAM·NAND 같은 메모리는 규모의 경제가 강해서, 한 번 선두에 오르면 산업 주도권을 오래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 시대가 오면서 메모리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AI는 “생각(연산)”만큼 “기억(메모리)”이 중요해졌고, 그 정점에 HBM(고대역폭 메모리)가 있습니다. 고성능 AI 시스템에서 HBM은 선택지가 아니라 사실상 필수 부품이 되었죠.


이 흐름은 시장 점유율에서도 드러납니다. 국내·외 보도와 금융권 추정치를 인용한 기사에 따르면 2024년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 55%, 삼성 40%, 마이크론 5%로 요약되기도 합니다. 즉 한국은 AI 시대의 ‘핵심 부품’을 쥔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한국 수출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2025년 한국은 연간 수출이 약 7,097억 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반도체 수출은 약 1,734억 달러로 집계된 바 있습니다.


한국은 “공장 역할”이 아니라, AI 성능을 좌우하는 부품(메모리)에서 돈을 버는 구조로 진화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AI 반도체 뉴스에는 대만이 꼭 같이 나올까


여기서 독자들이 가장 헷갈리는 지점이 나옵니다.

한국이 HBM을 만든다.

AI GPU는 최첨단 공정이 필요하다.

마지막에 ‘완성품’으로 엮어야 한다.


AI 반도체는 이제 단순히 웨이퍼를 찍어내는 게임이 아니라, 패키징(첨단 패키징)과 수율, 공정 통합이 승부처가 됐습니다. TrendForce도 파운드리 매출 성장의 배경으로 첨단 공정과 함께 패키징 수요를 언급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한국을 AI에 필수인 HBM 같은 핵심 부품을 쥐고 있으며, 대만은 그 부품과 로직 칩을 묶어 ‘완성’시키는 마지막 병목을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과 대만은 경쟁자이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결된 파트너가 됩니다.


“한국은 왜 TSMC처럼 못 하냐”가 아니라, “왜 구조가 다르냐”


한국은 재벌·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 속에서 반도체가 다른 산업(스마트폰, 가전, 전장, 배터리 등)과 함께 움직여 왔습니다. 이 구조는 자본과 인재를 빠르게 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파운드리만 한다”와 같은 단일 전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파운드리는 고객 신뢰 산업입니다. 설계 고객은 생산 파트너가 잠재적 경쟁자가 되는 순간, 의사결정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대만의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원칙이 신뢰 자산이 된 겁니다.


이 차이는 “한국이 못해서”가 아니라, 한국이 ‘IDM(종합 반도체)’의 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생긴 구조적 결과입니다.


한국 반도체의 다음 단계는 ‘TSMC 복제’가 아니다


이제 결론은 명확합니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TSMC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가진 강점(HBM·메모리)을 레버리지로 ‘완성 단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입니다. 패키징, 시스템 설계 협업, 공정 통합 역량, 그리고 공급망 신뢰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AI 시대에는 “누가 1등이냐”보다 누가 병목을 쥐고, 누가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하느냐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대만은 ‘세계 공장’의 병목을 쥐었고, 한국은 ‘AI 성능을 좌우하는 부품’의 병목을 쥐었습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뉴스에서 왜 한국과 대만이 늘 같이 언급되는지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도 달라집니다.


“한국이 TSMC가 될 수 있나?”가 아니라, “한국만의 반도체 산업 모델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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