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약속, 그리고 저녁 식사와 작은 다짐
토요일 저녁, 서울 한복판. 조용한 골목 안에 숨은 작은 레스토랑 앞에 도현은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다. 길게 숨을 들이쉰 그는 자동문을 밀고 들어섰다. 토요일인것 치고는 아직까지 손님이 많진 않았다. 노란 조명이 아늑하게 내려앉은 공간의 작은 테이블마다 촛불이 깜박였고, 잔잔한 재즈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혹시 예약하셨나요?"
직원의 환한 미소와 인사에 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도현, 두 명입니다."
직원은 그를 창가 쪽 구석 테이블로 안내했다. 조용하고 아늑한 자리. 도현은 의자에 앉자마자 긴장된 손끝을 문질렀다. 자주 만나는 사람이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만남이었다. 공적인 일 없이, 처음 가지는 약속이었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지우였다. 베이지색 니트에 진청 데님, 검은색 단화. 업무적으로 만났을 때의 단정하고 냉정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편안하지만 깔끔한 옷차림, 살짝 부드러워진 표정, 그 모습에 도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지우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하였다.
"대표님."
지우가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도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앉으세요, 지우 씨."
아직은 둘만의 만남이 어색한 두사람. 서로 존댓말은 아직 놓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작은 미소가 둘 사이를 부드럽게 엮어갔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짧은 대화가 오갔다.
"지우 씨, 스테이크는 괜찮으세요?"
"네, 좋아합니다. 대표님은요?"
"저도요. 그럼, 와인도 한 병 주문할까요? 괜찮으세요?"
"좋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특별한 날'이란 말에 도현은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무심한 듯 건넨 지우의 한마디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번졌다. 곧 직원이 주문을 받았고, 따뜻한 수프와 작은 식전빵이 먼저 나왔다. 식사는 서서히, 그리고 차분하게 무르익어갔다. 첫 잔의 와인이 서로 부딪혔다. 조용한 가운데 '챙' 소리가 테이블 위로 울려 퍼졌다.
"우리, 고생 많았어요."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요."
지우도 가만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천천히 와인을 음미하며, 그 동안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씩 대화가 깊어져 갔다.
"요즘 생각하면, 참 별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책 한권 쓸수 있을 것 같아요."
도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통관 준비할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CPNP 등록번호 누락...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분명히 검토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통관 보류되었다는 심사관 메일을 받고 식은땀이 났죠. 라벨 수정하려고 새벽까지 인쇄소를 붙잡았던 거, 기억나네요. 거기다 효진 씨는 울먹이고 있고."
도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웃었다.
"그때, 지우씨도 오셔서 도와주셨던 것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당시엔 정신이 없었죠."
지우는 수프를 한 입 떠먹으며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다 버텼나 싶어요. 서류 오류 나고, HS코드 엉켜서 세관 통과 못할 뻔했을 때..."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지우가 말했다.
"정말이지,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을 거에요."
"하루요? 어우, 말도 마세요. 저는 일주일 같았어요."
도현이 농담처럼 덧붙이며 웃자, 지우도 따라 웃었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 웃음이 퍼졌다. 그러다 도현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그나마 통관이 끝나서 한숨 돌리나 했더니, 바로 클레임이 들어왔어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첫 발주 물량에 대한 포장 이슈에, 그땐 정말 충격이었어요. 마티유 드랑이 이메일 보내고, 사진 첨부해서 보냈을 때... 그거 확인하는데, 이건 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한 선생님 없었다면, 망했을 거에요."
도현은 숨을 내쉬었다.
"그땐 정말 속이 다 내려앉았죠. 급히 재포장해서 다시 보내느라, 물류비 두 배로 들고..."
지우도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처리했잖아요."
"맞아요. 그렇긴 하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 메일, 보상 제안, 수정 제품 재발송. 다 신속하게 대응했으니까요."
"몸은 힘들어지만, 그 덕분에 신뢰를 잃지 않았죠. 고생 많으셨어요 대표님."
지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은 또 다른 기억들을 꺼냈다.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긴박한 순간들.
"그거 아세요? 현지 경쟁사가 뷰티스타 제품 베낀 거. 경쟁사도 아니죠. 알지도 못하는 기업이었으니..."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진씨한테 우연히 들었어요."
"진짜 억울했어요.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서 디자인 개발한 건데. 긴급 회의 열고, 변리사 불러서 대응 전략 세우고..."
도현은 힘없이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밤새 가품 샘플 분석하고, 항의 공문 보내고."
"대표님, 그때 많이 힘드셨죠? 그래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만큼 뷰티스타 코스메틱 제품이 경쟁력이 있다는 거 아닐까요?"
지우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우 씨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잠시,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보다 더 깊은 신뢰가, 그 순간 테이블 위를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와인 한 병이 거의 다 비워지고,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도 깨끗해져갈 즈음, 도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우 씨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여러가지로 많은 도움 받았어요."
지우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대표님 같은 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서로 여전히 존댓말을 유지했지만, 그 말들 사이에는 분명히 동료 이상의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서툴지만, 진심 어린 신뢰와 감사, 그리고 어렴풋한 기대. 식사를 마친 둘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꽃 향기가 가늘게 섞여 있었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조금 빠르게 걸으면 멀어지고, 조금 느리게 걸으면 손끝이 닿을 것 같은 거리, 묘하게 조율되는 보폭. 도현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혹시 지우가 부담스러워할까봐 조심스러웠다.
"오늘, 좋은 시간이었어요."
지우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요, 대표님."
짧은 말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신뢰, 존중, 그리고 설렘. 잠시 걷던 둘은 공원 근처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스치고,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지우씨."
"네, 대표님?"
도현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하다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뷰티스타를 지킬 거예요. 그리고, 지우 씨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에요."
지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대표님, 잘하실거라 믿어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드문드문 떠 있었다. 가끔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아래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조금 더 깊이 마음에 새겼다. 말없이 미소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현과 지우는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조심스럽지만 확실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뷰티스타 코스메틱 사무실에는 오랜만에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평화로움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대표님! 급한 메일이 도착했어요!"
효진이 다급하게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도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효진을 바라보았다.
"효진씨,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세요?"
"Cosmetic Europa에서 만났던 미나 하라다 바이어 있잖아요. 지금 한국 출장 중인데, 오늘 늦은 오후나 내일 중에 우리 사무실에 방문하고 싶대요!"
도현은 순간 멈칫했다. 미나 하라다, 전시회 당시 꼼꼼하고 예리했던, 일본계 독일 바이어.
'아, 미나 하라다가 한국에 방문하기로 한게 이번 주였구나...'
"정확히 언제쯤 온다고 하던가요?"
"가능하면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 중에 방문할 수 있다고 했어요."
효진이 노트북을 펼쳐 보여주었다. 메일에는 정중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샘플 확인 및 생산 파트너십 검토를 위해 직접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표님, 어떡하죠? 사무실, 준비해야 하는데..."
도현은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차분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당장 점검하도록 해요. 회의실, 샘플룸, 사무공간 전부 다. 아, 그리고 미나 하라다에게는 내일 오전에 방문 부탁드린다고 정중하게 메일 좀 보내주세요."
"네, 대표님!"
효진이 크게 답했다. 곧 유리가 호출되었고, 사무실 전체가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임시 비상 회의가 기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일단, 미나 하라다는 샘플 품질, 사무실 분위기, 조직 안정성까지 다 볼 겁니다. 특히, 일본계 바이어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체크합니다."
그리고 도현은 노트북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샘플 전시 테이블은 다시 정리하고, 설명용 카탈로그랑 인증서 사본은 한쪽에 깔끔하게 준비해둡시다. 제품 라벨링 문제 없겠죠?"
"어제 마지막으로 다 확인했어요.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체크할께요."
효진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하나 더!"
기석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우리 OEM 공장도 보여줄 수 있도록 준비 부탁드립니다."
"공장 방문까지요?"
도현이 놀라며 물었다.
"네. 만약 미나 하라다가 요청하면,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셔야 합니다. 미나 하라다는 분명히 공장을 보고 싶어 할 겁니다."
"어디 공장으로 할까요? 천안 쪽?"
"아닙니다, 파주 쪽이 상대적으로 품질 관리도 잘되고, 가깝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ISO 품질 인증을 추가로 받았고, 최신 설비 교체도 끝낸 상태입니다."
기석은 도현을 바라보며 빠르게 결정 내렸다. 그리고 도현이 말을 이었다.
"효진씨, 파주 공장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내일 오전, 혹시라도 방문 가능하게 준비 해달라고 해주세요. 긴급 요청이라고 반드시 말씀드리세요."
"네!"
효진은 노트북을 들고 황급히 나갔다.
"유리 씨, 사무실 정리 좀 맡아주세요. 회의실 테이블에 샘플 세팅을 다시하고, 효진 씨한테 미나 하라다 응대용 회사 소개 프레젠테이션도 좀 만들어줄 수 있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뷰티스타 사무실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벽에 걸린 액자들은 다시 반듯하게 정렬되었고, 샘플 진열대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닦였다. 회의실은 간결하고 품격 있게 꾸며졌다. 특히, 도현은 작은 디테일에도 신경을 썼다. 샘플 옆에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독일 깃발을 나란히 세워 두는 센스까지.
'일본계 바이어는 이런 디테일을 분명히 볼거야.'
도현은 속으로 다짐했다. 바깥은 여전히 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 안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미나 하라다의 이번 만남이 단순한 인사인지, 아니면 진짜 계약을 위한 전초전인지 도현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뷰티스타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