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2025년 8월 9일, 미국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하여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였다. 동시에 그는 ‘트럼프 라운드’라는 새로운 무역 질서를 개막한다고 알렸다. 이는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와 1995년 우루과이 라운드로 탄생한 WTO 체제를 마무리 짓는 역사적인 사건이자, 80년간 지속되어온 자유무역 규범의 종언을 의미한다.
이제 국제 무역의 중심축은 다자주의에서 강대국 중심의 양자 협상으로, 규범과 합의에서 힘의 논리와 조건부 개방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원하는 조건을 수용하는 국가에만 제한적 시장 접근권을 제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구조를 고착화하고 있다. WTO의 최혜국 대우 원칙과 무차별주의는 사실상 무력화된 셈이다.
대한민국은 GDP의 약 42%를 수출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무역 국가다. WTO 체제하에서는 다자 규범이 무역 분쟁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제 그러한 방패막은 사라졌다. 한국 경제의 수출 구조와 산업 전략, 나아가 외교와 안보까지 이 변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 라운드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에 두고, 관세를 무기화하는 새로운 무역 전략이다. WTO 분쟁 해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인 보복 관세를 부과하며, 협상에선 자국 규제를 완화하거나 투자를 유치하는 대가로 관세 인하를 제공한다.
이번 발표에서 미국은 EU, 한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주요 교역국과 개별 협상을 진행하였다. 한국은 대미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미국 자동차 안전 기준 수용 등 비관세 장벽 완화를 약속하였다. 이는 한미 FTA의 경제적 의미를 크게 축소시키는 조치이자, 한국의 협상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드러낸다.
문제는 관세만이 아니다. 미국은 원산지 검증 강화와 환적 차단 조치를 병행하고 있다. 원산지 위반이 적발되면 최대 40% 추가 관세와 벌금이 부과되며, 이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전략적 유연성을 크게 제한할 수 있다.
2025년 상반기,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로 글로벌 무역 질서가 요동쳤다. 한국(15%), 대만(20%), 베트남(20%) 등 아시아 수출 강국들은 모두 미국발 관세전쟁의 영향권에 들었다.
표면적으로 한국이 대만보다 5%p 낮은 관세율을 적용받아 유리한 듯 보이지만, 환율이 변수로 작용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대만이 자국 통화를 5% 평가절하하면 관세 차이로 인한 가격 격차는 사실상 사라진다.
이처럼 관세전쟁이 환율전쟁으로 확장되는 것은 전형적인 경로다. 환율은 금리정책이나 외환시장 개입 등을 통해 단기간에 조정이 가능하며, 경쟁국 간 관세율 차이가 작을수록 ‘경쟁적 평가절하(Competitive Devaluation)’의 유인이 커지기 때문이다.
경쟁적 평가절하란 무역 경쟁국보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 통화 가치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전략이다. 명목상 경기부양이나 수출 촉진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무역 파트너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단이다.
직접적인 환율 개입은 미국과 IMF의 ‘환율조작국’ 지정 위험이 크기 때문에, 다수 국가는 금리정책을 통한 간접 조정을 선호한다. 기존 연구 자료에 따르면, 기준금리를 1%p 인하하면 평균 1.8% 통화 약세가 나타난다. 만약, 추가적인 유동성 공급과 재정 확대가 결합되면 5% 수준의 약세도 가능하다.
이 과정이 확산되면 글로벌 경제에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인플레이션 재점화: 환율 약세는 수입물가를 상승시켜 생활비와 생산비를 동시에 끌어올림
자본시장 변동성 확대: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로 주가와 채권 가격이 하락 가능
미국의 대응 강화: 환율 절하를 통한 관세 회피를 문제 삼아 추가 관세나 금융 제재 부과
수출국 간 가격 경쟁 심화: 이익률이 낮아지고, ‘제로섬’ 경쟁 구도 심화
WTO 체제 붕괴와 환율전쟁 가능성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대응 전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교역 다변화와 공급망 재편이 필요하다.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CPTPP와 같은 지역 협정 참여를 확대하며 핵심 자원 공급망을 안정화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기술 주권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전략 산업의 국내 생산 생태계를 강화하고, 기술 표준 선점을 통한 협상력을 확보하여야 한다.
셋째, 정치·경제·안보 포괄 동맹을 강화하고, 실리적 외교를 통한 전략적 디리스킹이 필요하다. 한미동맹을 군사·경제를 넘어 정치·기술·문화까지 확장하고,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단절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재조정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업은 자사의 리스크 관리에 역량을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원산지 검증 및 환적 검사 강화가 예건되는 바, 이에 대한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하여 내부 컴플라이언스와 실시간 정책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WTO 종식과 트럼프 라운드의 개막은 단순한 무역 규범의 변화가 아니라 국제 권력 구조의 재편을 의미한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다자주의 무역 질서 속에서 성장해 왔지만, 이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뉴노멀’ 시대에 직면하였다.
앞으로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며 단기 생존을 모색하거나, 기술·외교·경제를 결합한 능동적 전략으로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는 것이다. 환율전쟁이든 관세전쟁이든, 결국 승자는 정책의 균형과 전략적 시야를 가진 국가일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눈앞의 관세 인하’에 만족하는 협상이 아니라, 미래 10년을 내다보는 산업·외교 전략이다. CPTPP 가입, 기술 주권 확보, 공급망 재편, 동맹 강화는 그 핵심 축이 될 것이다. WTO가 무너진 지금, 한국은 규범에만 기대어서는 안 된다.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와 산업 전략이야말로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할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