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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ul 10. 2022

천박한 연민에 대하여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세상의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생각한다.

생리 컵 문제에서부터 신한은행 여성 채용 사태와 같은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유리천장, 세월호 금식 투쟁 앞에서 저지르는 폭식 투쟁,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데이트 폭력, 소아 강간,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 추방 등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피력한다. 폭력 관련 기사에서 가장 혐오의 수치가 높은 말을 적은 댓글이 베스트 댓글로 선정되는 걸 자주 본다.


내 생각이 정말 옳은가, 다양한 부분에 있어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혐오를 조장하지는 않은가, 너무 납작한 의견은 아닌가, 편견에 치우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나 하는 필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다. 뒤돌아보지 않은 확신과 자기 신뢰, 지나치게 강한 자기주장은 그만큼 큰 실수나 상처를 불러온다고 생각되는 사례가 많다.

너무 쉽게 사람들에게 내 짧은 경험과 소견 안에서 조언하고 가르치려들지는 않았는지 생각을 더듬어보게 된다. 약자들, 신체적·정신적·물질적으로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현실을 보며 나는 성급한 일반화, 이 책에 따르면 천박한 연민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좀 더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누구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머물게 되면서 올라온 국민 청원을 본다. 무려 몇 주만에 2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찬성한 그 청원을 본다. ‘우리’ 나라에 ‘우리나라’ 사람 아닌 자들, ‘범죄를 잘 저지르는’ 자들이 들어왔다며 법으로 강제 추방해달라는 그 혐오로 가득한 글과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 수많은 그 ‘강한’ 의견을 가진 자들을 본다.

그리고, 집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겨 목숨을 걸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 혐오로 가득한 이 작은 나라에 오게 된 난민들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나라에 머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함부로 연민하려 드는 내 뻔뻔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경험함으로써 깨닫는 지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갖고, 낳고, 키워보기 전의 나는 현재의 나와 완전히 다른 인격체나 마찬가지이다. 아기를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던 시간들에서 느꼈던 초조와 불안, 기적적으로 아기를 임신하고 나서 받은 질문들(특히 가장 많이 질문받은 아기의 성별에 관련 것)에서 느낀 짜증과 염려, 아기를 출산할 때 느낀 두려움과 고통, 아기를 키우며 제대로 내가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불확신에서 오는 끊임없는 걱정,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느끼는 수많은 불편(수유실과 기저귀 교환대가 없으며 계단이 많은 바깥 환경과 노 키즈존들)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감히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단 아이 문제뿐이랴.

 장애인으로서 겪는 고통, 소수민족으로서 겪는 고통, 가난해서 겪는 고통 등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우리는 백 프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전에 겪어본 고통에 대해서도 금세 잊어버리고 타인의 고통은 경하게 여길 때도 많다. 노동자를 등쳐먹는 노동계급 출신 사장, 가정폭력을 심하게 겪고 그 폭력상을 똑같이 대물림 하는 부모들이 참으로 많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집에 손님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람들이 쉽게 퍼뜨리는 편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첫 번째 사건은 손님의 직장 내 장애인 채용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사람들은 감히 말하면 안 되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이런 사족을 잘 붙인다) 장애인 채용하면 힘들기만 해. 몸이 불편하면 정신도 이상해지는 경우가 많거든.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별생각 없이 한 말을 꼬아 듣고 물고 늘어져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밤늦게 계속 문자 오고 전화 오고...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나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내가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는 편의에 대해 응당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계단, 난간, 의자들에 대하여. 남을 욕할 때 ‘애자냐? 장애냐? 미쳤냐?’하고 쉽게 사용하는 언어에 대하여.


두 번째 사건은 이런 것이다. 우리 집 둘째를 보고,
“역시 남자애라 활동성이 다르다. 이목구비도 전혀 달라. 뼈대도 굵고. (내가 딸이라고 말하자) 정말? 난 파란색 옷을 입혀서 남자 앤 줄 알았네.”
이 작은 대화 안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점철되어 있는지.


나는 두렵다. 내가 쏟아내는 말의 홍수 속에서 함부로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사회에서 나에게 주는 프레임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 타인의 고통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무언가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용서할 줄 모르는 인간, 배울 능력이 없는 인간, 자기 자신에서 영원히 벗어날 줄 모르는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었음을,

부끄러움을 몰랐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런 시간을 돌아보고서 깨달은 것 하나는 분명히 있다.


누구도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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