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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Dec 27. 2022

산타가 앞집 들렀다 오겠지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때는 아이에게 산타의 비밀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었을 때다. 해리포터식으로 말하면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산타와 비밀파수꾼 계약이 묶였다고나 할까. 스네이프가 맺은 비밀파수꾼 계약처럼 목숨을 걸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동심을 지켜주려 진지하게 임한다. 그 진지함의 부분엔 12월부터 매일 밥상에 오르는 산타클로스와 선물과 착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매번 진심으로 듣고 토론하는 것이 포함된다.

너는 산타에게 선물 받을 수 있을 것 같니. 올 한 해 착한 일을 얼마나 한 것 같니. 산타가 동생이랑 싸운 건 나쁜 일로 칠까 안 칠까. 12월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선물 대상 목록에서 이름을 지웠다가도 다시 써줄까?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총 몇 번 정도 될까? 산타가 선물을 고르는 기준은 뭘까? 엄마 아빠가 너한테 주길 바라는 선물을 주시면 어떡할 거야?(나는 아이가 말 잘 안 들으면 산타가 수학 문제집을 선물로 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그러자 아이는 문제집을 쫙쫙 찢어버리겠다고 대답했다)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뭐지?


이런 류의 질문과 답을 수백 번 반복하다 보니 내가 과연 산타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긴장될 지경이었다. 바라는 선물도 시시때때로 달라서 한 날은 고양이 인형을 사달라고 했다가 한 날은 무지개색 색연필을 갖고 싶다 했다가 또 한날은 아주아주 커다란 스케치북을 갖고 싶단다. 또 첫째 둘째 녀석 각각 바라는 게 너무 달라서 한 달간 홈플러스와 동네 문구사를 종횡무진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말했던 선물들을 마침내 다 모아 벽장에 숨겨두고 12월 24일을 맞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을 대충 차려 먹는데, 아이들이 이제 드디어 산타가 선물을 주는 날이라느니 친구들은 산타가 없다고 한다면서 산타는 정말 있는 거냐느니 하며 또 산타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렸다. 첫째 녀석은 친구들이 유튜브에서 보고 얘기해줬다면서 산타가 없다고 하고, 둘째는 산타가 있다고 자기는 만나보기까지 했다고(유치원 운전기사분이 분장하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순식간에 자매싸움에 불이 붙어 식탁 위에 반찬이 엎어지고 고성이 오갔다.


그 꼬락서니를 조용히 지켜보다 내가 한마디 했다.

"확실한 건 산타가 우리 집엔 안 올 거 같네."

그러자 두 녀석이 싸우던 걸 멈추고 동시에 눈을 부라렸다.

"왜 산타가 안 와?"

"일단, 첫째 너는 산타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안 올 테고. 둘째 너는 언니랑 이렇게 싸우는데 산타가 오겠어?

산타는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러 오는 거야. 가족끼리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데 산타가 오겠어? 울면 안 돼 가사 생각해봐봐. 산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그 부분 나오지? 그럼 산타가 너네 싸운 것도 다 알 거야, 그? 그래서 우리 집엔 산타가 오지 않을 것 같아. 아, 슬프다. 나도 산타 만나보고 싶었는데."


첫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엎어진 밥그릇이며 반찬 그릇을 주섬주섬 챙겨 바르게 놓더니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우리 집에도 산타가 올 수도 있어..."

"왜? 스스로 착한 일을 올해 많이 했다고 생각해? 만날 동생이랑 싸우고 그러지 않았나?"

"응, 그건 그런데... 우리 아파트에는 나 말고 착한 애가 4명 살잖아(아파트 같은 라인에 초등학교 같이 다니는 애가 4명 있다). 걔네 집에 들르는 김에.... 어차피 오는 길이니까.. 더구나 앞집 사는 00 이는 아주아주 착하니까 산타가 선물을 꼭 줄텐데, 그 바로 앞에 우리 집이 있잖아... 그럼 산타가 우리 집에 진짜 잠깐만 들르면 되니까 그렇게 힘들진 않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 집에도 결국 올 거야."

그러곤 한참 우물쭈물 뭔가를 쓰더니 대문 앞에 떡 붙여놨다.


ㅋ.ㅋ.ㅋ.ㅋ.ㅋ.ㅋ.


산타 안 믿는다더니. 밤에 잘 때 눈 꼭 감고 두 손 모아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산타할아버지.. 아니 산타 할머니가 올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산타님... 제가 앞으로는 진짜 동생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엄마 아빠 말도 잘 들을 테니까 꼭 우리 집에 와주세요.. 제가 제일 아끼는 간식도 트리 밑에 뒀어요... 그거 꼭 드시고요.. 그리구 우리 앞집에는 애가 세 명이나 있는데 셋 다 착해요... 그 집 가는 김에 우리 집도 꼭 들러주세요."

 

그래서 우리 집에도 산타가 왔다 갔다.


해도 안 떴는데 일어나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있는 야광 플리퍼즈 2개, 쿠키맛 킷캣 한정판, 왕꿈틀이 젤리 큰 봉지, 전문가용 스케치북 2권, 무지개색 반짝이 색연필 2자루를 발견한 둘째가 집안 식구 모두에게 소리소리 질러서 잠을 깨웠고 그때부터 흥겨운 크리스마스 파티(대충 온 집을 어지르며 놀았다는 뜻)가 벌어졌다. 물론 중간중간 지들끼리 니가 더 많이 먹었네 내가 더 적게 먹었네 싸우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내가 '엄마 초등학교 3학년 때 벽장에 선물 숨겨둔 거 나한테 들켜서 내가 산타의 존재를 안 믿게 잖아'하면 아직도 '뭔 소리야, 산타가 그때 며칠 일찍 선물 두고 갔어, 너무 바빠서'이렇게 대답한다.

그래서 나는 사실 아직도 조금쯤 산타의 존재에 대해 믿고 있다. 내가 머글이라서 못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들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부터가 진짜 산타가 나에게 부여해준  자격이라고 생각하면서 올해의 산타 미션을 무사히 수행했다.


언제까지 내가 산타 대신 일할 수 있을까.애들  초등학교 졸업 전에 실직하고 싶지 않은데.


첫째한테 '너 착한 일 그래도 했나 보네, 산타가 온 걸 보니'하니까 첫째 놈 대답. '앞집에 오는 김에 우리 집에도 들렀겠지. 내가 그런다고 했지?' 하면서 의기양양해한다.

저런 소리 하는 거 보니 올해도 산타 핑계로 착한 일 시키긴 글렀다.


내년엔 진짜 산타 오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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