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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Dec 30. 2022

내년 계획을 세우고야 말았다

작년 12월 21일. 나는 2022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주 세세하고 거창하게. 그때 무슨 자기 계발서를 (잘못)읽고 부스터를 단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새해 계획을 세웠다. 그래. 사람이 계획이 있어야지. 계획을 세워야 이루지. 계획이 구체적이어야 실행을 하지 하면서 올해 연말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지옥행 목록을 짰었다. 옆에 빨간 체크박스도 그려놨다. 올해 연말에 이걸 이뤄 내 체크 표시를 하겠다는 각오로.  


1. 신춘문예에 낼 단편소설 최종 수정본 8개 만들기

2. 한 달에 2권 이상 종이책 읽기

3. 독서토론 모임 끝까지 열심히 참여하고 독후록 쓰기

4. 어쩌다 글쓰기 모임 마감 미루지 않고 쳐내기

5. 한 달에 200만 원 이상 벌기

6. 매일 30분 이상 뭐라도 쓰기

7. 머리 서기 완성하기


그야말로 성과 위주의 무시무시한 계획이었다. 천성이 게으른 내가 해내기 만무한 계획을 세워놓고 혼자 뿌듯해했다. 계획을 높게 세워둬야 그 반이라도 하지 하면서. 하지만 올해 이 계획을 보면서 남은 건 참담함, 절망감, 모멸감, 그리고... 열패감? 나 자신을 이기지 못한 데서 오는 이상한 패배의식이 의식을 덮었다.


그래서 올해 12월을 맞으면서 결심했다. 내년 계획 절대 안 세우기로. 아무리 내가 데일리 플래너 위클리 플래너 먼슬리 플래너 광인이라지만 이번엔 진짜 내년 계획 안 세운다. 나는 계획을 세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세우는 계획은 자존감 깎아먹기 대결이나 마찬가지다-는 생각을 가슴 깊이깊이 새겼다.

그렇게 12월 첫째 주와 둘째 주가 지났고... 셋째 주가 되니 나는 다리를 떨기 시작했으며... 결국 탁상달력에 일일 계획을 3월까지 세우고야 말았다. 탁상달력 계획은 괜찮아, 그건 정말 일상을 살기 위해 세우는 계획이니까, 그리고 1년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3월까지 일정만 써둔 거야, 하면서.

일일 계획을 적고 나서도 달력에 빈틈이 생기니 슬금슬금 정신 무장용 명언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명언을 읽으면 마음에 힘이 생기니까... 하면서 결국 달력을 빽빽하게 채웠다.

그리고 오늘.

12월 30일.

결국 내년 계획을 세우고야말았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으로 계획 노트에 '새해 계획'이라 안 쓰고 '새해 생각'이라고 큰제목을 달았다(애초에 계획 노트가 있는 것부터가 문제고 계획 노트에 쓴 생각이라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내용은 작년과 달리했다. 성과 위주의 계획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에 대한 계획을 썼다.


1. 마음에 드는 문장은 단정하고 예쁜 글씨로 필사하기(워낙 악필인 데다 괴발개발 필사하니 나중에 다시 읽 수가 없어서)

2. 화를 낼 때도 품위를 잃지 않기(특히 애들한테)

3. 기능과 상관없이 매일 나를 지지하고 칭찬하기

4. 감사일기 쓰기

5. 주께서 나보다 더 선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기


여기에 브런치에 평일 3회 이상 글쓰기, 출판사 100군데 이상 투고하기를 덧붙였다가 슬그머니 지웠다. 그렇게 못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자괴감으로 바닥을 치고 싶지 않아서.

내년 이맘때가 됐을 때는 적어도 스스로를 칭찬 많이 많이 해 준 한 해였다, 이렇게 기억하고 싶어서 '새해 생각'3번에 별표를 쳐놨다. 이런 것도 계획으로 세워놔야만 할 수 있는 마음 작은 사람이라.


아이고.

이제 올해가 이틀 남았다.

생각해보면 수월하게 넘어간 해가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왔다는 게 참 대견하다.

그런 의미에서 셀프 토닥토닥 10초를 해줬다. 오그라들고 어색하지만 매일 하다 보면 이것도 늘겠지.

그럼 '새해 생각'에 따라 감사 일기를 마저 써야겠다.


계획 세우지 않은 것에 감사. 범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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