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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an 31. 2023

나는 어디에 있어도 나예요

나는 지금 세부에서 2시간 반가량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 보홀이란 섬에 와 있다. 비소식이 2 주 내 예정되어 있는데 우리 집 날씨요정(첫째가 가는 곳은 일기예보 상관없이 무조건 날이 개어서 날씨요정이 되었음)을 믿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날씨요정 덕분인지 세찬 비는 내리지 않아서 그럭저럭 옷깃을 적시며 야자수가 서 있는 흙길을 걸어 다니는 중.


어디에서든 쉽게 말을 고 마음을 여는 건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같은 한국사람이면 일단 좀 경계하고 모르는척하는데 아이들은 국적 상관없이 나이가 비슷한 것 같으면 금세 같이 물놀이를 한다. 지금도 수영장에서 생면부지의 아이들과 말도 안 되는 영어를 써가며 놀고 있다. 시험 삼아 로컬 마사지숍에도 데려가봤는데 마사지사분들과 되지도 않는 영어로 장난치더니 이내 드러누워 쿨쿨 잠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 있든 결국 내 모습 그대로다.

남의 기분 맞추려 애쓰고, 칭얼거리는 둘째를 계속 업고 다닌다.

무엇보다 흥정을 못한다. 흥정을 못하는 게 제일 문제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디스카운트 말을 못 한다! 당연히 디스카운트를 외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쭈볏쭈볏. 나도 내가 답답하다. 외국 나와서 제일 힘든 게 길거리에서 가격 흥정하는 거다. 배우자는 반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물건을 사 오는데 나는 깎아달라는 말을 못 해서 원가의 두 배를 주고 같은 물건을 사 온다. 아이고야.


아무튼 나는 여기서도 나 자신인 게 너무 싫어서 점심 먹을 때 산미구엘 필센 한 병을, 수영장에서 다이키리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술이라도 마셔야 비대한 자의식을 잃는다.


그런데 다이키리를 마시면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에 나왔던 문장이 기억났다. 같은 칵테일을 같은 레시피로 만들어도 사람마다 맛이 천양지차라고. 맛있게 만드는 사람은 대충 만들어도 맛있고, 맛없게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도 맛이 없다고.

어제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어준 사람은 기가 막힌 다이키리를 먹게 해 줬는데 오늘 사람은...........

쩜쩜쩜.


맛없는 다이키리를 들이키며.


나 자신아 멀리 가라.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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