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의 맛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와 조니워커

by 수현씨

시간이 없어 벼르고 벼르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를 드디어 다 보았다.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이솜 분)는 돈이 없어 길거리에 자는 한이 있어도 흡연과 위스키 마시는 일을 매일 신념처럼 지키는 인물이다.


위스키는 나에게 너무 생소한 분야라 여기 저기 찾아보았다. 브랜드별로 맛이 아주 다양하고, 단숨에 털어넣는 것이 아니라 오래 두고 조금씩 마시는 술인듯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처음 먹어본 사람이 위스키의 짠 맛, 탄 맛, 쓴 맛, 고소한 맛, 달콤한 맛을 모두 느끼긴 어려운 듯하다. 와인처럼 어느정도 혀가 단련되고 여러 번 먹어봐야 알 수 있는 맛인가?

서울에 산다면 마땅히 누릴 수 있었을 풍류 중 하나일텐데 시골 사는 나로선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위스키바에서 마시면 잔당 만오천원 이상 호가한다 하니 아무 때나 갈 수는 없겠으나, 책에서만 읽었던 에그녹 같은 술을 실제로 맛볼 수 있다면 큰 기쁨 될 것이다.


해리포터 책에 나오는 버터맥주처럼.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고 무척 감동받았을 때 일본에 있는 유니버셜스튜디오에서 해리포터 존을 가본 적이 있다.

책에서 보았던 승강장, 온갖맛이 나는 젤리를 파는 잡화점, 유명한 마법사의 갖가지 지팡이들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살 수 있는 점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버터맥주다.

해리포터 존 중앙부에서는, 해리포터 책에서 론과 헤르미온느, 해리포터가 비밀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마셨던 버터맥주를 커다란 오크통에서 바로 따라 먹을 수 있게 해 두었다(겨울철엔 따듯한 버전도 있다).

을 읽으며 너무너무 궁금했던 그 맛, 버터와 맥주의 조합이 어떤 것일지 머리속으로만 상상했던 그 맛을 실제로 먹었을 때는 무척 실망했다(밍밍한 버터스카치 캔디 물 맛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다시 해리포터존에 갈 수 있다면 다시 사 먹을 것만 같다. 활자로만 만났던 내용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의 의미는 어마어마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위스키도 나의 현실로 다가오게 해 보고 싶다. 실제로 먹어보면 실망할 수도 있고,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돈만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경험해보는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니는 어떤 것도 있다고 믿으며.

서촌동 코블러에 올해 연말에 꼭 가 볼 수 있기를.




이 글은 1년 넘게 묵혀두었던 글이다.

그때부터 소공녀가 준 위스키에 대한 로망을 계속 키워왔다.

그 행동력 있는 로망이, 결국 몇 달 전에 깡통시장에서 위스키 한 병을 구입해 마셔보게 했다는 것을 기록해 둔다.

입문자용으로 풍미 좋고 가성비 좋다는 위스키를 여러방면으로 공부해보고 구입한 술이었다.


처음 땄을 땐...

알코올램프를 그 돈주고 사왔나, 싶었다 .

배우자가 옆에 서 있었는데 손소독제 쏟았냐고 했다.

에어레이션(위스키 뚜껑을 따고 공기가 통하게 해준 후 시간을 좀 두는 것)을 해주면 알코올이 좀 날아가면서 위스키 본연의 풍미가 올라온다기에 그렇게 해두고 일단 기다렸다.


2주쯤 지나고 다시 뚜껑을 열자, 오. 과연.

진한 오크향과 바닐라향이 약해진 알코올냄새를 헤치고 솟아올랐다.

낮은 잔에 큰 얼음을 넣고 조금 따라 마셔봤더니 과일향과 오크향, 특히 진한 바닐라향이 목과 코를 타고 올라왔다.

독주는 여러 번 마셔봐야 익숙해진다고들 하는데 내겐 아무래도 40도는 무리라서 가끔 유난히 고된 날 미지근한 물을 타서 마시곤 한다.


미소처럼 위스키를 제대로 음미하면서 마시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미소가 위스키란 것을 내 삶에 넣어준 게 고맙고 기뻐서, 그를 생각하며 마신다.


오늘은 반 잔만.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소공녀를 틀어놓고 미소랑 같이 마셔야지.


매거진의 이전글폭풍우 속에서 다이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