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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Oct 19. 2023

인연이 무르고 약해지는 시간

아침부터 모든 게 엉망인 날이었다. 해묵은 가족 갈등이 불거졌으며(그냥 묻어두면 좋을 것 같은데 참 그래지지가 않는다) 참가한 모임에서도 회원끼리 갈등이 있었고 아이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다 사람과 얽힌 일이다.


사람이 없으면 슬프고 외로운데 있으면 있는 대로 괴롭고 답답하다. 이럴 때 사람으로 다시 위로받고 싶은 것도 참 아이러니다. 마음이 어수선해서 괜히 더 쏘다니고, 사람들 모인 데를 찾아다녔다. 털끝만 한 위로라도 받고 싶어서.


그래도 심리 상담받으면서 마음이 진일보했다는 걸 느꼈다. 상황과 감정을 조금쯤은 분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이 나한테 이러는 건 내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 문제라는 걸 조금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내가 뭘 잘못했나 땅굴 파러 삽 치켜들었을 것이다. 혹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갈등 당사자랑 싸움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해묵은 상처를 건드리고 자존심 깎아내리는 심한 말을 해도 일단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싸우지 않고 내 진심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기도 했다. 그 정도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물론 상대방은 내 진심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상하는 건 상하는 거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머리로는 다 이해했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했다.

괜히 식물들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큘레이터를 틀어줬다가, 잎에 분무를 해 줬다가, 식물등을 켰다가 껐다가 했다. 식물의 고요함에 조금이라도 물들고 싶어서.


 때 아이가 있어 참 감사하다. 아이들은 언제나 내 마음을 강제로 현실에 붙잡아 매어 준다. 가족 문제에 대해 천착하려는 순간 물을 쏟고, 싸움을 벌이고, 유치원에서 배워 온 노래를 고막이 터지도록 부른다. 그러면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과거의 아픔으로 달려가려던 마음이 현실에 강하게 발을 디딘다. 내가 받았던 아픔과 상처에 몰입하려 할 때마다 내 마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와준다. 철학이나 명상의 최종적 단계가 마음을 현재에 두는 거라는데, 참 나는 얼마나 감사한지. 누구든 옆에 미취학 아동 2명만 있으면 마음 지금 이 현실에만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 아이 재우고 난 뒤가 두려울 때도 있다. 아이가 잠들고 난 시간은 혼자 내 괴로움에만 골몰하는 시간,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그래서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시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이번 달엔 인연이 정리되는 달인가 보다.

오래 알던 사람과 연이 끊어졌고, 가족과도 소원해졌으며, 아이 학원도 결국 끊기로 했다. 아이 인생에서 최장기간 다닌 학원이었는데(아이가 9살인데 3년 가량 다녔다. 인생의 1/3을 보낸 곳인 거다! 그것도 주 5회!). 같이 다니는 애가 집요하게 괴롭혀서 도저히 더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전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괴로워하고 이유 모를 반성과 후회를 했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브런치를 켜서 이 글을 썼다. 뭐라도 쓰고 나면 생채기 난 부분이 좀 가라앉고 가지런해질 것 같아서.

쓰고 나니 오늘 하루를 견딘 내가 새삼 장하다. 다시 이 하루를 겪으라면 정말 싫을 것 같다.

누구든 자기만 아는 치열한 싸움을 견디고 있겠지.

오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나간 시간을 물처럼 흘려보내고 담담히 내일로 나아가자.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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