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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민 Jan 11. 2024

57. 폴 퀴즈 온더 블록

경남 인재개발원은 경남의 모든 행정 공무원을 교육하는 곳이다. 2016년부터 그곳에서 사이버 범죄 예방 강의를 하고 있다. 개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공무원이다. 따라서 그들도 1년 또는 2년에 한 번 인사이동이 있다. 강의 의뢰를 하던 분 중 한 사람과 페이스북으로도 친분을 나눴다. 그가 2021년도에 경남 자치 경찰위원회로 발령 났다.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 관서들끼리 연결되는 내선 전화기가 울려 업무 전화겠거니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행정 공무원인데 어떻게 이 전화를 이용했지?’라는 의문을 해소하려는 듯 자치 경찰위원회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간단히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가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자신의 부서에서 ‘스토킹 피해자 신변 보호 사업 홍보영상’을 제작할 예정인데 내가 출연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평소 내 활동을 봐왔기에 홍보영상 제작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에게 “그거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거 하겠습니다.”라고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시나리오 등 자세한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시나리오와 촬영 일자 등 세부사항을 받았다. 제목이 ‘폴 퀴즈 온 더 블록’이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패러디해서 유재석, 조세호, 출연자 역할이 있었다. 유재석 역할엔 다른 경찰관 한 명이 폴 재석(폴리스)으로 조세호 역할은 그가 공 세호(공무원), 나머지 출연자 역할은 내가 맡기로 했다. 나는 스토킹 신변 보호 사업을 홍보하는 경찰관 역할이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대사가 제법 많아서 놀랐다. 촬영까진 2주가 남아서 충분히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뮤지컬을 한다고 하는 놈이니 기대가 클 것 같아 연기 연습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대사를 읽으며 목소리 톤, 손동작, 표정을 연구했다. 몇 번을 해도 어색한 것 같았다.      


다행히 촬영 전까지 대사는 모두 암기했다. 한두 군데 헷갈리긴 했지만, 그 단어를 빠트려도 말이 되는 그런 부분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맘에 촬영장으로 가는 내내 연습했다. 약속장소인 경상남도 경찰청 앞에 도착하니 촬영 장비가 보였다. 주차 후 차 안에서 경찰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세부 일정에 대해 들었다. 외부에서 폴 재석과 공 세호의 간단한 시작 장면과 내가 등장하는 모습을 찍고 내부에서 본 장면을 찍는다고 했다. 첫 장면에선 딱히 할 것이 없어 그들이 촬영하는 것을 구경했다. 마지막에 멋지게 걸어서 등장하기만 하면 됐다. 그 멋지게 걷는다는 게 말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몰랐지만.      


외부 촬영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끝났다. 우린 내부로 이동했다. 내부를 보고 깜짝 놀라 ‘우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앞쪽에는 카메라가 다섯 대 정도 있었고, 중간에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온 작은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이건 뭐 완전 방송국이라 해도 믿을만한 수준이었다. 세트장에 압도되어 잠시 머리가 멍해졌고, 혹시나 대사를 잊을까 봐 다시 시나리오를 들여다보며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 외웠다. 대사를 외우고 있는 나와는 달리 두 사람은 평온해 보였다. 그들은 대사가 적혀있는 큐 카드를 들고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부러웠다. 나에게 시련을 준 그를 티 나지 않게 살짝 흘겨본 후 현실을 받아들였다. 제작 감독님이 곧 시작할 테니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자 긴장감이 확 몰려왔다. 앞에 놓인 카메라를 보니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래 나는 이들보다는 프로다. 즐기자’라고 맘으로 외쳤다. 긴장됐던 맘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행히 촬영은 한 번에 쭉 이루어지진 않았다. 한 장면씩 촬영해 나중에 편집한다고 했다. 그러자 훨씬 편해졌다. 대사도 틀리지 않고 줄줄 튀어나왔다.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은근 내 실력을 보여주고 싶은 호승심도 있었다. 준비를 잘 해와서인지 예상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촬영을 마쳤다. 처음 해보는 두 사람도 능청스럽게 꽤 잘했다. 재미있어서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오히려 일찍 마친 것이 아쉬웠다.      


영상 편집본은 2주 뒤에 나왔다. 유튜브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받았다. 주변 동료들과 영상을 봤는데 그럴싸했다. 진짜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유튜브 영상이 올라왔다. 나도 열심히 여기저기 홍보했다. 영상은 조회 수 6만을 달성했다. ‘에이 얼마 안 되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공익 영상으로 6만은 커다란 성과라 볼 수 있다. 후속 작품을 기대했는데,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번엔 더 잘 할 수 있는데’라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 하나의 추억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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