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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민 Aug 29. 2024

74. 차라리 백지였다면

아는 것이 많아지고 경험이 늘어날수록 내 마음의 짐도 무거워진다. 나는 12년 차 강사이고 강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있다. 2주간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두 번째 주에 강의  시연을 해야 한다. 평가를 받고 합격, 불합격 여부까지 통보받는 무서운 과정이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늘 해오던 것이고 평가도 몇 번이나 받아봤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교육을 받을수록 내 경력이 오히려 부담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알던 것이 사실이 아닐까 봐 두렵기도 하고 사람들의 기대도 마음을 짓누른다.


처음인 이들은 무엇을 해도 그러려니 이해가 된다. 그들은 열심히 생각하고 자신의 것을 만들어내면 된다. 하지만,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대치를 넘어서야 한다. 평소 자신의 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여기선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나도 하던 걸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교육에 임했다가 혼쭐이 나는 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뒤집히고 섞이고 있다. 만들고 없애고 애써 만든 도자기를 깨뜨리는 장인의 마음이 이럴 것인가 싶다. 벌써 세 번이나 자료를 만들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렸다. 글을 쓰는 지금도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럴 땐 그냥 백지이고 싶다. 조금 안다는 것이 오히려 생각을 더 방해하고 있다. 그동안의 패턴과 관점이 '이쯤 하면 되잖아'라고 유혹한다. 누군가보다 조금 더 안다는 것은 자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춰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에게도 감춰야 할 듯하다. 그래야 더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여 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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