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진학해서 공부에 머리가 트였다. 후배들에게는 공부 잘하는 선배로 알려졌고 자신감이 붙어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점도 계속 좋아졌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4학년 2학기 성적은 4.2점으로 마무리했다. 40명의 학우 중 여학생 후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늘 2위를 차지했다. 남자 동기 중에서는 성적이 가장 좋았다. 그러한 것들이 나를 자만의 함정 속으로 내몰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최고라 생각했고, 지금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
4학년 1학기 초입 동기 대부분이 취직 문턱을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품질관리 기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품질관리 기사 자격증 시험은 합격률이 20% 미만일 정도로 어려웠다. 3년 동안 1등을 차지했던 그 여 후배도 두 번이나 떨어졌다. 그 자격증을 가지면 우리 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생각해 도전했다. 같이 준비하던 학우들이 두 번 정도 떨어지자 자격증 취득을 포기하고 토익 등 다른 준비로 발길을 돌렸다.
산업공학과는 3학년 2학기 전공 필수과목에 품질관리가 포함된다. 품질관리 학점을 A 플러스 받았고 첫 시험에서 1등을 했다. 다른 과목에 비해 더 재미있었고 나와 성향이 잘 맞았다. 품질관리 자격증 시험은 1차 2차 모두 필기시험이다.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수업 때 배운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해볼 만하다 싶었다. 가장 친한 친구 녀석과 함께 매일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첫 번째 시험에 응시했다. 친구 녀석과 앞뒤로 앉았는데 시험 시작 10분 전 눈빛 교환을 한 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문제를 다 풀던 그렇지 않든 간에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랬다. 어차피 떨어질 거 차라리 그 시간에 머리나 식히러 가자는 의견이 통해서 시험 직전 나와버린 것이다. 다른 응시자들이 모두 우리를 이상한 놈들 보듯 바라봤다. 다음 시험에 꼭 합격하리라 다짐하며 pc방으로 향했다.
두 번째 시험만에 친구와 나는 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해 졸업생 중 우리 둘만 합격했고 학우들은 우릴 부러워했다. 그런데 자격증은 내 자만심만 더 키워버린 도 그 사과였다. 자만심은 내 사고 회로를 마비시켰다. '우리 과 남자들 중 내가 학점이 가장 좋고 자격증도 있으니 대기업에 갈 수 있어', '그리고 교수님이 알아서 좋은 기업 추천서를 주실 거야.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이런 되지 않는 생각으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다른 학우들은 하나둘씩 취업에 성공했지만 딱히 부럽진 않았다. 대기업이 나 같은 인재는 알아서 모셔갈 거라고 철저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저런 바보가 다 있지?'라고 생각할 거라는 것을 안다. 부끄럽지만 진짜 난 우물 안 개구리보다 더 세상을 몰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수님이 기업 추천서를 하나 건네주시기는 했다. '00토이'라고 장난감을 만드는 중소기업이었는데 대기업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 추천서는 내 친구에게 돌아갔고 친구는 그 회사를 다니다가 몇 년 뒤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추천서라도 오지 않았다면 조금 일찍 정신을 차렸을 텐데 여전히 기다림은 계속됐다. 4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를 제외한 학우들 대부분 취직에 성공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취업문은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으려는지 닫혀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준비를 하지 않았던지라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 무렵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과연 어떤 전화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