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난히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유명 정치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그 이전에도 같은 선택을 한 이들이 있었다. 연예인은 과거의 사건으로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스포츠 선수 역시 오래된 폭력 문제로 회복이 어려운 지경까지 몰리곤 한다.
이런 사건들은 잠잠해질 만하면 반복된다. 겉으로 보기엔 분야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이들에겐 묘하게 닮은 공통점이 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기보다, 먼저 변명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말로 무마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디지털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증거는 언제든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은 더 많이 알고 있고, 피해자들 또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집단의식 속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변명은 방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혹을 키우고, 사람들의 관심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긴다. 그 관심이 모두 정의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질투가 섞여 있다. 나보다 위에 있던 사람이 추락하는 장면에서 느끼는 묘한 쾌감, 그것이 인간의 숨겨진 본성이다.
그래서 변명은 늘 불리하다. 말을 보태는 순간, 꼬투리는 늘어나고 설명하려 할수록 의심은 정교해진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피해자 앞에 서서 조건 없는 사과를 했다면 어땠을까.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피해자에게 “말하길 잘했다”는 마음만큼은 남겼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사과는 더 이상 공격할 지점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사과는 다른 사건들과 비교되며 오히려 기억된다.
그들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도, 그때 비로소 생긴다. 이 이야기는 유명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잘못을 입으로 인정하는 일은 어렵다. 체면이 있고, 잃을 것이 있고,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명은 반드시 더 큰 대가를 부른다. 사과에 변명을 섞는 순간, 그것 역시 변명일 뿐이다. 진정한 사과란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잃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 입장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용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시간이 지나 더 많은 것을 다시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