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경찰 직장협의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다.

by 오종민

나는 밀양경찰서 초대 직장협의회장을 거쳐 제2대 회장까지 연임하며 동료들의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국회의원을 찾아가 목소리를 높이고, 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하며, 마이크를 잡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제복 입은 동료들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경남경찰청 소속 23개 경찰서 직장협의회장 모임의 임원으로서도 쉼 없이 달렸다.


2020년, 마침내 직장협의회법이 통과되며 경찰 조직에도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2년 뒤인 2022년, 또 한 번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직장협의회법 개정으로 드디어 '전국 단위 연합체' 설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각 지방청이나 경찰서 단위로 흩어져 있던 비공식 모임들이, 비로소 하나의 강력한 법적 단체로 결속할 수 있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곧바로 전국 연합체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0여 명의 경찰서 회장단이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 집결했다. 1박 2일 동안 회칙의 뼈대를 잡고 조직을 구성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회의장 문이 닫히자마자 거센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법 개정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전국 연합을 표방해 오던 특정 그룹이 준비위원회를 주도하려 나선 것이다.


"특정 세력 중심으로 조직이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각 시도 경찰청에서 공평하게 한 명씩 대표를 뽑아 위원회를 꾸려야 합니다!" 회의장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터질 듯했다. 결국 200명의 회장단이 투표용지를 집어 들었고, 개표 결과는 109 대 91. 각 청별 대표 체제를 요구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승리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 피로감에 눈을 감으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경남청 연합 회장이었다. "경남청 대표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미 만장일치로 결정 났습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내 의지와는 철저히 무관하게,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첫 전국 단위 직장협의회의 밑그림을 그리는 경남청 대표 준비위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일주일 뒤 열린 첫 준비위원회 회의는 마치 살얼음판 같았다. 위원장 선출부터 회칙의 토씨 하나까지, 이해관계가 얽혀 날 선 공방과 고성이 오갔다. 나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오직 '무엇이 옳은가'에만 집중하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경남청을 대표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내 입술에 힘을 실어주었다.


두 번째 모임, 나는 자진해서 회의록 작성을 맡았다. 그런데 이 꼼꼼한 기록이 발단이 되어 준비위원 임원진에까지 덜컥 선출되고 말았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운 자리였지만, 이왕 맡은 바에야 제대로 해내자는 오기가 생겼다. 녹취록을 반복해 들으며 밤을 새워 회의록을 정리했다.


전국 회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데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위원들의 의견은 평행선을 달렸다. 우리는 묘안을 냈다. 쟁점이 되는 조항들을 무리하게 하나로 합치는 대신, 1안, 2안, 3안으로 나누어 '가안'을 만든 뒤 각 경찰청 대표들의 최종 판단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결전을 위해 일주일 뒤 충남의 한 리조트에서 1박 2일 워크숍이 열렸다. 벼랑 끝에 몰렸다는 위기감은 오히려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밤을 잊은 치열한 난상토론 끝에, 마침내 회칙이 완성되고 선거관리위원회 구성까지 극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서로를 쏘아보던 위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땀범벅이 된 서로를 격려했다.


그 후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초대 전국 경찰 직장협의회장이 무사히 선출되었고, 나는 그해 7월 밀양경찰서 직장협의회장직에서 홀가분하게 물러났다. 전국 단위 직장협의회가 마침내 거대한 닻을 올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긍지를 느꼈다.


처음엔 귀찮고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던 자리였다. 하지만 그 치열했던 탁상 위에서의 전투는 나를 한 뼘 더 성장시켰다. 각자의 위치에서 경찰의 미래를 고민하던 동료들의 맹렬한 눈빛과 열정은 지금도 내 심장을 뛰게 한다. 무거운 왕관의 무게를 견뎌낸 그 시간들은, 내 경찰 인생 23년 중 가장 빛나는 훈장으로 남아있다.

매거진의 이전글54. 자존감 포인트를 적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