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나날이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오랜 세월 수많은 현장을 누비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내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은 통제할 길이 없었다. 희망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는 듯한 턱 막히는 숨가쁨. 하지만 늘 삶을 사랑하고 긍정적이었던 내가, 이대로 어둠 속에 잠식당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작정 집 밖을 나섰다. 휴일의 낮, 바람은 꽤 쌀쌀했지만 햇살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주었고 거리는 생기 넘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쇼핑몰 앞 벤치에 멍하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만히 좇았다. 그들의 일상적인 백색소음에 섞여 들어가자,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상념들이 잠시나마 휘발되는 듯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낯설지만 달콤한 평화였다.
불현듯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을 땐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다스려줄 책 세 권을 주문했다. 그때만 해도, 그 세 권의 책이 나를 구출해 낼 동앗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장 먼저 펼친 책은 『자존감 수업』이었다. 20페이지 남짓 읽어 내려갔을 때,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책 속에는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과 증상이 마치 내 일기장을 훔쳐본 것처럼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내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추락해 있었다는 뼈아픈 자각. 하지만 그 순간 기적처럼 희망이 피어올랐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활자들을 흡수하듯 읽어나갔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실천법이 나올 때면 당장이라도 해보고 싶어 조급증이 일 정도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내 안의 열정이 다시 꿈틀대는 순간이었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결심했다. ‘좋아, 지금부터 나를 구하기 위한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를 시작하자.’ 그것은 마치 내 삶을 무대로 한 롤플레잉(RPG) 게임 같았다. 게임 캐릭터가 몬스터를 잡고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을 하듯, 나는 일상에서 자존감 포인트를 하나하나 모으기로 했다.
첫 번째 퀘스트는 '외모의 틀 깨기'였다. 친한 동생이 운영하는 헤어숍을 찾아가 다짜고짜 말했다. "요즘 봄을 타는지 마음이 영 뒤숭숭하네. 스타일을 완전히 뒤엎고 싶은데, 네가 보기에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머리로 알아서 해줘. 손질법도 꼼꼼히 알려주고." 거울 속 변신한 내 모습은 꽤 근사했다.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미소가 지어졌다.
이어진 두 번째 책에서는 "남의 시선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을 때 자존감이 오른다"고 했다. 나는 홀로 쇼핑몰로 향해 태어나서 처음 시도해보는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집어 들었다. 다음 날, 그 옷을 입고 출근하자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어울린다는 칭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꼿꼿해진 어깨와 함께 자존감 1포인트가 경쾌하게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퀘스트는 '작은 성공의 누적'과 '연대'였다. 조기 축구팀 감독에게 조심스레 내 마음의 병을 털어놓자, 그는 나를 돕고 싶다며 나를 최전방 공격수로 배치했다. 골망을 흔들 때마다 짓눌려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쾌감이 밀려왔다. 설령 골을 놓치더라도, 다시 잔디를 박차고 달리는 도전 자체가 눈물겹게 값졌다. 감독은 틈틈이 커피 쿠폰을 보내며 나를 다독였다. 말없이 내 아픔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명약보다 강력한 치유제였다.
자존감의 게이지가 차오르자, 1년 넘게 두려워 미뤄두었던 '유튜브 채널 개설'이라는 보스 몹(Mob)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마이크와 조명을 세팅하고, 서툴지만 유료 편집 앱을 결제해 무작정 부딪혀 보았다. 첫 영상은 투박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결국 내가 이걸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은 자존감을 단숨에 10포인트나 끌어올려 주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대미를 장식한, 가장 위대하고도 어려운 마지막 퀘스트는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거울 속의 나를 향해 “사랑해”라고 말해주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는 내 어깨를 스스로 토닥이며 “오늘 하루도 정말 수고했어. 넌 잘할 수 있어. 사랑해”라고 속삭였다. 심지어 내가 나에게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직접 녹음해 출퇴근길 차 안에서 틀어놓았다. 처음 내 목소리가 차 안을 채우던 날,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낯설고 쑥스럽게만 느껴졌던 내 목소리가, 평생 남을 챙기느라 정작 나 자신은 홀대했던 내 영혼을 그토록 깊게 안아줄 줄은 몰랐다.
결국 나는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마음의 근육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고, 무엇보다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벼랑 끝에 서본 사람만이 그곳에 서 있는 다른 이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 때로는 백 마디 위로보다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것, 따뜻한 커피 쿠폰 한 장을 건네는 그 작고 다정한 행동이 한 사람의 생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배웠다.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깊이 앓았던 그 시간만큼 내 영혼의 품이 넓어졌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떨고 있을 누군가에게 감히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강인한 회복의 힘이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