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부터 경남 인재개발원 외래강사로 활동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유독 에너지가 넘치던 여성 담당자가 한 명 있었는데, 강의가 끝난 뒤 우리는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가끔 '좋아요'나 댓글로 생사(?)를 확인하는 느슨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부서를 거쳐 자치경찰위원회로 발령 났다는 소식을 끝으로, 우리의 연락도 자연스레 뜸해졌다.
그러던 5월 중순의 어느 평일 오후. 사무실 전체가 업무로 정신없이 돌아가던 중 내 자리에서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 바로 그녀였다.
짧은 안부를 묻기가 무섭게 그녀는 흥미로운 본론을 꺼냈다. 자치경찰위원회에서 '스토킹 피해자 신변 보호 사업' 홍보 영상을 만드는데, 나를 콕 집어 출연자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꽤 재미있었다. 평소 내 페이스북에서 연극 활동을 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고, 카메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는 거다. 나의 소소한 SNS 기록이 뜻밖의 오디션 포트폴리오가 된 셈이다.
'오호, 또 재미있는 판이 벌어지겠군!'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며칠 뒤 메일로 날아온 시나리오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절로 웃음이 터졌다. <폴 퀴즈 온 더 블록>. 누가 봐도 유명 예능 프로그램인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패러디한 기획이었다. 거제경찰서 직원이 '유재석' 역을, 그녀가 '조세호' 역을 맡았고, 나는 그들이 만나는 스토킹 범죄 전문가(여성청소년 담당 경찰관) 역할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훑어보니, 아뿔싸. 내 대사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았다. 내용은 평소 하던 업무라 익숙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뱉어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촬영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주 남짓.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맹연습에 돌입했다.
처음엔 눈으로, 그다음엔 소리 내어, 나중엔 대본에 맞춰 표정과 손동작, 미세한 목소리 톤까지 연출하며 달달 외웠다. 촬영 전날까지 출퇴근길 차 안에서도, 사무실에서 틈이 날 때마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머릿속에는 완벽히 입력됐지만, 슛(Shoot)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질까 봐 두려웠다. '생각'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툭 치면 자판기처럼 '자동'으로 대사가 튀어나오도록 뇌 대신 근육에 새겨 넣었다.
대망의 촬영 당일.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남색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경남경찰청 정문 앞 광장에 섰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야외 촬영에 긴장감까지 더해져 등줄기로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다행히 첫 장면은 두 MC의 소개에 맞춰 내가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컷이라 단 두어 번 만에 가볍게 오케이를 받았다.
진짜 승부는 실내 본 촬영이었다. 경찰청 옆 미술관 2층에 마련된 세트장을 본 순간,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복도 한구석을 개조한 세트장은 실제 '유 퀴즈' 촬영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완벽했다. 게다가 우리 세 명 앞에는 무려 다섯 대의 카메라가 살벌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정된 의자에 앉자마자 동공이 흔들렸다. '도대체 어느 카메라 렌즈를 보고 말해야 하는 거지?'
각자의 시선 처리와 담당 카메라를 배정받고 본격적인 슛이 들어갔다. 대본 카드를 들고 읽는 두 MC와 달리, 나는 온전히 암기력과 순발력으로 승부해야 했다. 중간중간 긴장 탓에 대사가 꼬일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평소 강의하던 내 말투로 자연스럽게 애드리브를 쳤다. 오히려 정해진 대본보다 흐름이 훨씬 매끄러웠다.
철저한 준비는 배신하지 않았다. 엔지(NG)는 거의 없었고, 약간의 실수는 편집으로 덮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대사는 물 흐르듯 술술 쏟아졌다. 결과는? 예정된 종료 시간보다 무려 2시간이나 일찍 촬영을 끝마쳤다. 밤샘 촬영까지 각오했던 스태프들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번졌다. 내심 이 짜릿한 무대가 끝나는 게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벅찬 후련함이 밀려왔다.
2주 뒤, 드디어 완성본이 도착했다. 사무실 동료들과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 선배님 진짜 방송인 같은데요?" "편집 미쳤다!" 세련된 편집과 기대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나의 연기(?)에 다들 감탄을 쏟아냈다.
다음 날, 영상은 유튜브에 정식 공개됐다. 속으로 아주 잠깐, '이 영상이 대박 나서 진짜 유 퀴즈 작가한테 섭외 전화 오는 거 아냐?'라는 발칙한 상상도 해봤다. 조회 수는 약 6만 회. 국민 예능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었지만, 딱딱하기 쉬운 공공기관의 정책 홍보 영상으로서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친 성공적인 수치였다.
지금도 가끔 그 영상을 다시 보며 생각한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스쳐 지나갈 뻔했던 강의장의 인연이, SNS의 작은 기록들과 만나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흘린 땀방울은 또 다른 세상으로 나를 연결해 줄 것이다.
내가 선 자리에서 묵묵히, 그리고 즐겁게 나의 일상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또 다른 재미있는 무대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