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잠들지 않는 나만의 이력서이자 스피커다. 당장 눈에 띄는 반응이 없더라도, 내가 하는 일과 생각들을 꾸준히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담장 너머의 세상과 연결되는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첫 강의의 기회가 그랬고, 연이어 나를 찾아온 재미있는 경험들이 모두 그 증거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SNS가 쏘아 올린 새로운 초대장이 날아왔다.
발신자는 경찰 인재개발원 교무과에 근무하는 김OO 후배였다. 5년 만에 걸려 온 전화였지만, 짧은 안부 끝에 그는 대뜸 흥미로운 제안을 던졌다. 충북 시청자미디어재단에서 '보이스피싱 예방 홍보 영상' 제작을 의뢰받았는데, 내 SNS에서 사이버범죄 예방 강의 영상을 보자마자 무릎을 치며 연락했다는 것이다.
'오, 이거 또 구미가 당기는데?' 나는 굴러온 기회를 좀처럼 피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번에도 1초의 망설임 없이 "콜!"을 외쳤다. 영상의 총괄 기획과 시나리오, 메인 출연은 내가 맡고, 촬영과 편집은 후배가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끝냈다.
영상의 길이는 5분 남짓, 주 시청 타깃은 60대 이상 어르신들이었다.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면 딱 두 가지 핵심 사례만 찌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60대 이상 부모님들의 가슴을 가장 철렁하게 만드는 두 가지 단골 멘트, "엄마, 나 폰 고장 났어"로 시작되는 메신저 피싱과 "OO소파 98만 원 결제 완료"라는 허위 결제 문자를 주제로 잡았다. 과거 온라인 강의를 숱하게 기획해 본 짬바(?)가 있었기에, 실제 현장 사례를 툭툭 털어 넣자 제법 찰진 시나리오가 뚝딱 완성됐다.
촬영은 2주 뒤 수요일, 아산에 위치한 경찰 인재개발원으로 정해졌다. 근무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챙겨두고, 당일 새벽 6시 동트기 전부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산까지 10시 안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낯선 무대를 향해 달려가는 엑셀 페달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피로감보다는 설렘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오전 9시 40분, 5년 만에 마주한 후배와 반갑게 회포를 풀며 시나리오를 최종 수정했다. 차 한잔 마시며 어떻게 앵글을 잡을지 작당 모의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본 촬영은 오후로 밀리고 말았다. '이러다 오늘 안에 못 찍고 해가 지는 거 아냐?' 잠시 걱정이 스쳤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뭐 어때, 못 찍으면 다음에 또 놀러 오지 뭐!'
배를 든든히 채우고 본격적인 슛(Shoot)에 들어갔다. 이론 설명 파트는 내 몫이었지만, 문제는 '사례 재연' 장면이었다. 리얼리티를 살려줄 사기꾼과 피해자 대역이 시급했다. 우리는 다급히 옆 사무실 문을 두드려 남녀 경찰관 두 명을 '긴급 체포'해 왔다.
대본을 쥐여주며 약간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필요하다고 밑밥을 깔았는데, 웬걸? 카메라가 돌아가자마자 이 두 사람의 눈빛이 돌변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준비된 배우들처럼 맛깔나는 대사 처리를 선보이는 게 아닌가! 목소리 톤만 살짝 교정해 주었을 뿐인데, 실제 보이스피싱 녹취록을 틀어놓은 듯 완벽한 호흡이 터져 나왔다. 현장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갈 줄 알았던 촬영은 두 경찰관의 신들린 메소드 연기 덕분에 오후 4시에 산뜻하게 마무리되었다.
일찍 끝나서 후련하면서도, 무대에서 내려올 때면 늘 그렇듯 짙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설레는 시간은 야속하게도 체감 속도가 세 배는 빠르다. 일상으로 복귀한 뒤, 2주라는 편집 시간은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도착한 가편집본 속 내 모습은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또 하나의 그럴싸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묵직한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사무실 동료들의 쏟아지는 호평을 거쳐, 영상을 의뢰했던 재단 측으로부터 "매우 만족스럽다. 제작 후기까지 꼭 써달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도전은 늘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두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솔직히 말해, 굳이 하지 않아도 내 월급과 일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선택 사항'이다. 모른 척 지나치면 당장의 몸과 마음은 편안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때 한번 해볼걸' 하는 눅눅한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처음 내딛는 길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렵다. 하지만 막상 발을 푹 딛고 걸어가 보면, 생각보다 제법 걸을 만한 평지가 펼쳐진다. 그 끝에 찬란한 성공이 기다릴지, 아니면 작은 실패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시도했다'는 그 땀방울의 감각만큼은 고스란히 내 안의 근육으로 남는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뛰어들었던 이번 아산행도 그랬다. 과정은 유쾌했고, 결과는 달콤했다. 이렇게 쌓인 작은 성취감들은, 훗날 또 다른 낯선 문이 열렸을 때 주저 없이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든든한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