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펼칩니다. 하얀 빈 화면 위로 커서만 무심하게 껌벅입니다. '오늘은 기필코 한 편을 완성하리라' 다짐하며 책상 앞에 앉았지만, 머릿속은 모니터보다 더 하얗습니다. 글뿐만이 아닙니다. 기획 보고서를 쓸 때도, 유튜브 시나리오를 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른오징어 쥐어짜듯 머리를 굴려봐도 쓸만한 문장 하나 건지기 벅찹니다. "일단 무조건 써라"라는 누군가의 조언을 위안 삼아 자판을 두드려 보지만, 억지로 채워 넣은 활자들은 금세 길을 잃고 맙니다. 결국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하며 애꿎은 노트북만 덮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영감은 늘 책상 밖에서 불쑥 찾아옵니다. 선잠에서 깼을 때 기막힌 글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행여 날아갈세라 허겁지겁 스마트폰 메모장을 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운전대를 잡고 꽉 막힌 도로를 지날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치지만, 당장 적을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습니다. 산책할 때, 심지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에도 영감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지금 이 글 역시 목욕탕에서 번쩍 떠오른 생각을 붙잡기 위해 집에 오자마자 젖은 머리로 노트북을 열고 쓴 것입니다.
왜 아이디어는 이토록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걸까요? 전문가들은 샤워나 익숙한 길 운전하기처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 없는 '자동 조종(Autopilot)' 상태일 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된다고 말합니다. 따뜻한 물로 씻거나 가볍게 걸으며 긴장이 풀리면 뇌에 알파파(Alpha wave)가 흐르는데, 이때 경직된 논리적 사고의 빗장이 풀리고 무의식 속에 흩어져 있던 과거의 기억과 정보들이 자유롭게 춤추며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뇌과학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저 멍 때리고 쉰다고 해서 하늘에서 아이디어가 뚝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10년부터 6년간 경찰 홍보 업무를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타 경찰서와의 홍보 경쟁은 소리 없는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톡톡 튀는 아이템을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책상머리에 앉아 밤을 새운 적도 많았지만,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은 24시간 내내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 버스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창밖으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가게의 간판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뇌리에서 스파크가 일었습니다. 내내 끙끙 앓던 홍보 아이템과 간판의 문구가 퍼즐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쾌감! 저는 당장 수첩을 꺼내 휘갈겼고, 다음 날 사무실로 출근하자마자 그것을 기획안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그해 꽤 훌륭한 성과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어떤 글을 쓸까',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까'를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제 글이 누군가에게 닿아 공감을 얻는 상상을 하며 혼자 '씨익' 바보처럼 웃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상을 온통 글쓰기로 채워두었기에, 멍하니 샤워기를 틀어놓은 순간 뇌가 비로소 여유를 찾고 그동안 모아둔 재료들을 기가 막힌 요리로 완성해 내놓는 것 같습니다. 개그맨들이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것도 천재성 이전에 '웃음'에 미쳐 있는 치열함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디어는 결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무언가에 빠져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들이 무의식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고,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그 조각들이 만나 찬란한 불꽃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빛나는 창의력은 '치열함'과 '쉼'이 완벽한 왈츠를 출 때 탄생한다고 봅니다. 치열함 없는 쉼은 그저 나태일 뿐이고, 쉼 없는 치열함은 금세 방전되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무엇에 열렬히 구애하고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 뜨거운 몰입 뒤에, 자신만의 '산책'이나 '샤워' 같은 온전한 쉼표를 찍어주고 있으신가요? 치열하게 사랑하고, 다정하게 쉬어보는건 어떨까요? 여러분이 애타게 찾는 그 위대한 해답은 바로 그 '치열함과 쉼의 교차점'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