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대 안 그래"라는 위험한 착각

by 오종민

'구명보트 딜레마'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고 실험이 있습니다. 거친 파도 한가운데 난파된 배, 그리고 정원을 초과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로운 작은 구명보트. 누군가 침묵을 깨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야 나머지가 살 수 있어." 결국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쪽으로 의견을 모읍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잔혹한 딜레마 앞에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반응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지? 나는 절대 저러지 않을 거야." 과연 그럴까요? 저는 이 서늘한 질문에 부딪힐 때마다 제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묻습니다. '과연 나는 다수를 위해 스스로 바다에 뛰어드는 소수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제게는 저를 기꺼이 희생시킬 용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뼈아픈 결론에 도달하곤 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나는 아닐 거야", "나는 저들과 달라"라고 단언합니다. 그 말 속에는 '나는 더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묘한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거친 현장에서 사람들의 가장 날 것의 모습을 마주해 온 저는, 그 확신이 얼마나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지는지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를 볼 때 쉽게 그의 '성격'이나 '본성'을 탓합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야." 반면, 자신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상황적 참작'을 부여하죠. 이른바 '통제의 환상'이자 '기본적 귀인 오류'입니다.

진짜 비극은 이 견고했던 착각이 깨지는 순간 시작됩니다. "나는 절대 안 그래"라며 자신하던 사람이 코너에 몰려 결국 똑같은 행동을 저질렀을 때, 그가 받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가 왜 이랬지?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무너져 내리는 것은 단순한 체면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던 세계관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깊은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고, 때로는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더 잔인하고 무모한 행동마저 서슴지 않게 됩니다. "나는 다르다"는 오만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착각은 타인을 이해할 기회마저 차단합니다. 그 사람이 처했던 복잡한 맥락과 감정, 벼랑 끝의 상황은 지워버린 채 상대를 납작하게 평가해 버리니까요. 더 나아가, 내게는 그런 위기가 오지 않을 것이라 맹신하기에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마음의 비상구'조차 만들어두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성장은 역설적이게도 **"나는 한없이 부족할 수 있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그 서늘한 순간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섣불리 "나는 절대 안 그럴 거야"라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도 그럴 수 있다"**라고 되뇝니다. 평소 존경받던 국회의원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내가 저 자리에 갔으면 절대 안 저래!"라고 말하지만, 저는 조용히 생각합니다. '나 역시 저 진흙탕 같은 환경에 놓인다면, 물들지 않고 버텨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올바른 의지를 품어도, 그것을 압도하는 환경의 중력 앞에서는 누구든 흔들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이 짧은 문장은 저를 객관화하는 훌륭한 브레이크가 되어 줍니다. 위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게 마음의 맷집을 키워주고, 나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 타인을 비난하기보다 "저 상황이면 나라도 흔들렸겠다"며 포용할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점 없는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부러질 수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똑바로 직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이 말은 나를 깎아내리는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허상에서 벗어나 두 발을 단단한 현실에 딛게 만드는 가장 용기 있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척박한 현실 위에 똑바로 서 있는 사람만이, 위기의 순간에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단단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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