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던 물음표가 삶의 느낌표가 되기까지

by 오종민

“혹시 질문 있으신 분?” 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의실 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입니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들은 일제히 바닥으로 향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무언의 사투가 시작됩니다. 괜히 펜을 만지작거리거나,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적막을 깰 뿐입니다. 분명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하지 못한 표정들이 역력한데도,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저는 23년간 경찰 교육 현장, 공공기관 특강, 소규모 워크숍 등 수많은 단상에 서며 이 기시감 넘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마주해 왔습니다. 한국 사회는 유독 '질문'에 인색합니다.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한국 기자들에게 특별히 질문 기회를 주었음에도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던 일화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저는 그 원인을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세 가지, 즉 **'정답 중심의 교육', '수직적 위계구조', 그리고 '체면 문화'**에서 찾습니다.


첫째, 우리는 '정해진 과녁'에만 화살을 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철저한 정답 중심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질문하는 법'이 아니라, '주어진 정답을 누구보다 빠르게 찾는 법'을 주입받으며 자랍니다. 정해진 답을 향해 전력 질주해야 하는 교실에서, 엉뚱하거나 본질을 찌르는 질문은 종종 '진도를 방해하는 과속 방지턱' 취급을 받습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엔 유독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질 때마다, 교실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학우들은 약속이나 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또 시작이네'라는 짜증 섞인 눈빛이 제 뒤통수에 꽂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모르는 눈치길래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총대를 멘 것임에도, 돌아오는 건 차가운 눈총뿐이었습니다. 특히 수업 종료를 앞두고 던진 질문은 거의 대역 죄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저는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수업이 끝난 후 조용히 교수님을 찾아가 묻는 방식을 택해야만 했습니다.


둘째, '계급장'이 주는 무게감입니다. 학교, 군대, 그리고 직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견고한 수직적 위계구조로 짜인 곳이 많습니다. 이런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상급자를 향한 아랫사람의 질문은 자칫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눈치 없는 반박'으로 오독되기 쉽습니다.


23년 전, 이제 막 경찰복을 입었던 초임 시절의 저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찰이라는 거대한 제복 조직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기에, 하늘 같은 선배들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건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묻지 않고 짐작으로 넘겨짚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현장에서의 잔실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돌아오는 질책은 제 어깨를 한없이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욕먹는 게 두려워 시키는 일만 하는 수동적인 로봇처럼 변해가는 제 모습을 발견한 순간,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모르면 묻자. 욕을 먹더라도 제대로 알고 일하자.'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혼날 각오로 던진 질문에 선배들은 질책은커녕, 오히려 반색하며 답해주었습니다. 무뚝뚝하던 고참 형사가 자신이 아는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던 그 신난 표정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질문이 쌓일수록 저의 실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선배들의 노하우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조직에서 '일 머리 있는 경찰'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은 도전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가장 정중한 존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나를 가두는 '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면 날 무시하지 않을까?", "나 혼자만 엉뚱한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망치면 어쩌지?" 무리에서 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둥글게 묻어가려는 심리, 즉 체면이 우리 스스로의 입에 자물쇠를 채웁니다.


고백하건대, 저 역시 처음부터 당당하게 질문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만 못 알아들은 거면 어쩌지?'라는 부끄러움이 호기심을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체면을 지키기 위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넘길수록, 제 안의 답답함은 썩은 물처럼 고여갔습니다. 아는 척 연기하는 제 모습이 오히려 더 한심하고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안전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잃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치명적입니다. 질문을 거세당한 뇌는 타인이 떠먹여 주는 정보를 거름망 없이 삼키며 비판적 사고력을 잃어버립니다. 누군가 짜놓은 견고한 틀 안에서 평생 수동적인 부품으로 맴돌게 되는 것이죠. 더 치명적인 것은 성장의 멈춤, 즉 '도태'입니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혁신은 "왜 그럴까?", "다르게 해 볼 수는 없을까?"라는 발칙한 물음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음표를 던지지 않는 개인과 조직은 낡은 방식을 답습하다 결국 고인 물이 되고 맙니다.


질문은 흔히 무례하거나 성가신 것으로 오해받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날카로우면서도 정중한 질문은 "내가 당신의 이야기에 온전히 매료되어 깊이 몰입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찬사입니다. 다수가 숨죽인 공간에서도 허를 찌르는 질문 하나가 던져질 때, 굳어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공간에는 새로운 활력이 돕니다.

질문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여는 '마스터키(Master Key)'입니다. 남들이 당연시 여기는 일상에 의심을 품고 물음표를 던지는 순간, 우리의 시야는 확장되고 보이지 않던 새로운 통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루하고 평범했던 일상을 짜릿하고 생동감 넘치게 뒤바꿔놓는 마법, 그것이 바로 질문의 힘입니다.


바야흐로 '생성형 AI 시대'입니다. 이제는 정답을 아는 것보다 '어떤 질문(프롬프트)을 던지느냐'가 개인의 역량을 결정짓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3년 차 베테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저조차도, 여전히 더 좋은 질문을 찾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해서 묻고 두드릴수록 제 삶의 해상도가 놀라울 만큼 선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은 잠시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내 안의 아주 작은 호기심부터 하나씩 밖으로 꺼내어 물음표를 달아보는 겁니다. 그 작은 용기 끝에서, 여러분의 삶을 뒤흔들 풍성하고 경이로운 해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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