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외롭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
왕가위 감독 영화 '해피투게더'에 관한 고찰
여기, 한 남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선에는 동성애의 사랑 이야기로 치부하고 외면할 수 있겠으나, 끝까지 영화를 곱씹다 보면 동성애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함축시켜 놓은 영화에 가깝다.
자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보영(장국영), 책임감이 강하고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야휘(양조위), 그 중간에서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관망하는 창(장첸).
재미있는 사실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세명의 남자로만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 여성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이 갖고 있는 사랑의 본질은 같으며 대상만 다를 뿐이다, 라는 의도로 영화를 해석하면 모든 장면은 사랑을 묘사한 시처럼 다가온다.
세 인물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개인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리하여 누구는 질투하고, 누구는 구속을 느끼며, 누구는 혼자가 좋다고 느낀다.
그러나 셋이 향하고 있는 마음의 근원은 여전히 사랑임을 알게 된다. 사랑을 주고받는 상대가 다를 뿐 우린 어디에서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으로 이야기를 골인시키지 않고 모두의 이별을 통해 그리움을 남겨놓는다.
보영은 야휘가 떠난 방에 돌아와 흐느껴 울고, 야휘는 보영이 없는 이과수 폭포수 아래 홀로 떠나와, 슬픔을 느낀다.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폭포 아래에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둘이 떠나오고자 했던 곳에서 사랑했던 사람은 없고, 끝내 혼자 남아 있는 장소에서 느끼는 슬픔은 얼마나 거셌을까.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없이 혼자 느끼는 아름다움은 반쪽을 잃은 아름다움이다. 사랑은 가능한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할 수 있을 때 빛이 나는 것이기에.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치유에 가까운 엔딩을 보여준다.
야휘의 슬픔을 묻어두고자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장소 우슈아이아에 가서 녹음기에 담긴 아휘의 슬픔을 듣는 창. 창의 마지막 등장은 슬픔을 묻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길 바라는 회복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두 남자의 동성애를 그린 퀴어 영화를 넘어선 인간의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그려놓은 휴머니즘 영화에 가깝기도 하다.
둘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못하고 바람처럼 찢겨졌지만,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였던 날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나.
지난 날 애절했던 사람과의 사랑까지 반추하게 되는 명작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숨겨놓은 구멍 하나가 있다면 그 구멍은 외로움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구멍 하나를 매우기 위해 서로를 포옹하고 사랑을 찾아 나서는지도.
늘 사람에게 깨지고 상처받고 돌아오면서도 계속해서 사람을 찾는 보영(장국영)처럼말이다.
사람은 외롭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를 이해했다면 그 둘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해피투게더. 이 영화의 제목처럼 그럴 수 있길.
안녕과 사랑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