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움직이는 힘, 뇌물과 선물 3
기자들이 차를 몰게 되면서 언론인의 지사 분위기는 사라져 갔다.
기자들이 종로와 명동의 술집을 전전하며 기자들의 기백을 이야기하거나 언론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 사라져 갔다. 선비에서 월급쟁이로 바뀐 것이다. 서민생활과 멀어진 중, 상류층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대폭 증면된 신문에서 기자들이 발로 뛰며 서민들의 애환을 다루는 사회면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순봉 의원이 기자 시절, 밤새 경찰서 유치장을 다니며 ‘어디 억울한 사람 없소!’하거나, 장애 문제로 대학입시에 떨어진 억울한 사연이 구제되는 일이 사라진 것이다.
억울한 서민들의 사연은 기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9시 뉴스가 시작되자마자 방송에서 보도되는 “땡…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땡전뉴스’는 정권의 순치와 함께 언론의 자발적인 호응인 합작품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자 언론 내부로부터 “정권의 순치로부터 벗어나 언론의 고유 사명인 정론직필로 돌아가자”는 자성 운동이 생겨, 동아‧조선의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 ‘한겨레신문’이다.
한겨레 기자들이 처음 국회나 관공서, 청와대를 출입할 때, 기자들은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며 갈등이 많았다. 취재처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관행으로 주는 촌지를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현실적으로 부닥쳤다.
한겨레 기자들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밥은 먹되 촌지는 받지 말자’였다. 하지만 한겨레만 촌지를 안 받으면 다른 언론사도 못 받고, 결국은 기자들의 조건 없는 부수입을 차단하기에 출입처의 기자단에서 ‘왕따’가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문제는 기자의 양심 차원이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언론문화와 관련된 것이다. 관행과 소신이 빚어내는 갈등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기자들 관리가 어려워진 인터넷신문이 생기면서 해결되었다. 대폭으로 늘어난 언론사를 감당할 수도 관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에게 우호적인 '보호 세력' 구축 차원에서 두 번의 총선 때 정치자금을 돌렸다. 공개된 재산은 모두 환수되었다. 그는 이미 추징금 전액을 낼 여력이 없었다. 그걸 강조하다 보니 젊은 판사 앞에서 “내 재산은 29만 1,000원이 든 예금통장이 전부”라고 말한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돈에 대해 통이 크고, 통치기간 나름대로 큰 족적을 남겼던 전 대통령을 언론은 ‘29만 원 노인’으로 희화화시켰다.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자금 중 아들에게 흘러들어간 돈은 그래도 의미가 있었다. 그 돈이 소비적인데 사용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불모지인 미술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시공사'를 만들어 문화사업에 쓰였기 때문이다. 시공사는 풍부한 자금으로 영세한 출판계에서 엄두도 못 내는 좋은 책을 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이었던 최영미 시인도 한때 시공사 직원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군사정권,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다가 졸업 후 밥을 먹는 곳이 그의 아들이 하는 회사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방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으로 훗날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집이 나오게 된다. 출판사에서 고액을 주다 보니 시공사에는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가수 조용필의 노래 가운데 주옥같은 가사를 쓴 양인자 씨도 시공사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전재국 시공사 사장이 출판계에 미친 긍정적 힘도 많았다. 그만큼 시공사는 좋은 책을 많이 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도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자금 환수에는 미온적이었다. '정치보복'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전두환 대통령과 아들, 친인척의 자금을 거의 몰수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고 가혹하게 환수했다. 심지어 DJ에게 화합의 의미로 전재국 씨의 결혼선물로 받은 글씨까지도 압수되어 경매가 될 정도였다. 복수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왜 전두환 일가에게 그렇게 가혹했던 것일까. 10.26 이후 최태민을 격리시킨 앙금을 최순실이 잊지못해 복수하려고 했기 때문일까. 10.26 이후 박정희 정권을 폄하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청와대의 금고에서 나온 자금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에게 6억 밖에 돌려주지 않은 서운함이었을까. 그 진실은 당사자만이 알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