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훈 Apr 18. 2017

통치행위와 촌지

사람을 움직이는 힘, 뇌물과 선물 2

국회의원들이 돈의 상당수는 자신의 미래와 정치적 도약을 위해 사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 용도는 대개 기자들을 접대하는 술값이다.

 

국회의원이  받은 돈의 상당수는 기자들이 술로 먹어치운다. 그러나 뇌물이 공개되면 지금까지 친밀했던 그 관계는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 기자들이 의원을 앞장서서 물고 뜯는 것이다. 그렇게 명멸했던 야망찬 의원들이 우리 헌정사에서 어디 한, 두 명이었던가.        


‘마음이 담긴 약간의 돈이나 작은 선물’을 뇌물이라고 하지 않고 ‘촌지(寸志)’라고 표현했다.  보내준 고마움에 비해 작은 마음을 준다,  내 마음의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이라는 촌지라는 말은 정말 좋은 뜻이다. 촌지를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라 하여 ‘인정(人情)’이라고 말했다. 촌지와  비슷한 말로 보내준 마음에 작게 보답한다는 미의(微意), 작은 성의라는 미성(微誠)도 같은 뜻이다. 비슷한 어휘가 20개 정도 있으니 한국의 '뇌물문화'는 그 역사가 아주 깊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정치를 하려면 기자들에 대한 접대는 어쩔 수 없다. 정치인 자신에 대해 다루는 직,간접적인 기사에 대한 호의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인은 물론 행정부, 기업도 마찬가지인데 심지어 청와대도 그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이 있을 때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촌지를 조금씩 주었다.  명절을 앞두고는 기자들에게 줄 촌지 예산이 없자, 당시 논밭이었던 강남을 개발하는 중에 땅을 대략 5백에서 천 평 정도로 나눠 그 땅문서를 기자들에게 주어 촌지가 아닌 뭉텅이 마음인 ‘장지(壯志)’로 주었다. 당시 아무리 서울 변두리인 강남땅이 싸다 해도 그래도 서울 땅이다.      


기자들은 이 장지를 들고 그날 밤 모여서 포커판에 쏟아부었다. 승자의 전리품인 강남의 땅문서는 승자와 패자가 모여 호기 있게 술집에 고스란히 바쳐졌다. 지금까지 그 땅을 갖고 있어 팔자가 피었다는 기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촌지는 그야말로 촌지처럼 사용될 뿐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모든 정치자금 통로를 자신으로 일원화했다. 국가 정의를 목표로 정권차원에서 사회정화를 주창하는데 여기저기서 기업에 손을 벌이면 정권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부가  통치행위를  원만하게 하려면 여야를 순치하는데  음성적인 자금이 필요하다. 그 통치행위에 필요한 돈이 바로  통치자금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금을 모집하는 악역을 맡았다. 그가 군에 있을 때 어려운 여건에서도 돈을 아끼지 않고 쓰고 통 크게 행동했다는 것은 그의 부하나 군 출신들이 다 안다.      


전두환 대통령의 그 기질은 정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재벌들에게서 모은 자금을 그는 필요한 곳에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그래서 당에는 큰 자금을 수시로 보냈고 장관들이 임명장을 받으러 올 때는 돈이 필요하면 자신이 줄 터이니 일체의 이권에 개입하지 말고 구설수 없이 오직 국가를 위해서만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에서는 군사정권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오히려 국민과 조직에서 신임받는 장관, 존경받는 장관이 많이 나왔다. 이임하는 장관은 전 대통령의 평가에 따라 전별금이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두둑했다.      


청와대에서 내려주는 기자들의 촌지도 역대 정권 중 전두환 대통령 때가 가장 후했다. 대통령 순방 때 따라가는 기자들의 비용은 청와대에서 다 제공했다. 그때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정말 할 만했다고 한다. 외국 순방을 가면 회사에서 경비가 나오는 데다 청와대에서 일체의 경비 외에 또다시 촌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외국 순방할 때 따라가면 월급쟁이인 기자로서는 만지기 힘든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더구나 이때는 80년 ‘언론통폐합’으로 언론사가 대폭 줄어들었고 지방은 1도 1사 원칙에 따라 부실 언론사는 모두 정리되었다.  기자수가 대폭 줄어든 데다 더욱이 청와대 출입기자는 각 언론사에서 차출된 능력 있는 중견기자들이다. 정권의 ‘언론 관리’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시절이었다. 문공부에서도 기자들과 수시로 만나 정국 견해를 들어 정책에 반영하고 그 여론을 위에 올렸다. 그 내용이, 1987년 다시 부활한 국정감사에서 나온 자료로 기자협회보에 대서특필된 ‘언론인 접촉보고서’다.      


한국언론이 대중과 다소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기자들의 봉급이 대폭 인상된 언론통폐합 이후부터다. 기자들의 생활이 서민대중과 유리되고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기자들의 관심이 자연 서민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