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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계탕 Aug 12. 2024

시가 읽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여유를 갖는 건에 대하여.

시를 즐겨 읽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낀 적이 많다.


저런 애매모호하고 해석이 다분한 문장들 사이에

‘푹’ 빠져들수가 있다고..?


언제나 좀 더 ‘빠르게‘ 읽히는 것

좀 더 ‘강하게’ 터치해주는 것

‘직접적인 지침’을 내려주는 것을 찾아

하염없이 서핑을 하던

‘현실충’이


어쩌다가

‘애매모호한’ 인생 이야기를 마주하기라도 하면

‘에이씨 철학충 또 뜬구름 잡네’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사실은, 사실은.


부러웠다.


그런 애매한 표현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머리에 너무 많은 과제가 산적해

인생을 이루고 있는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어루만지고 숙고할 기회가 없던 나는,

내 마음은,

내 머리는,

애매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그 ‘1초‘가 아까워

‘좀 더 분명한 것‘을 찾아 돌아다녔다.


마음에 빈틈을 허락한 사람만이

‘애매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지적인 수고’는 그들의 특권이다.

그래서 나는 부럽다.

눈으로 시를 읽는 사람 말고

‘마음에서 시가 읽히는’ 사람이 부럽다.


애매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품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 그때 그 말이 이런 뜻이던가’

마주하는 그 순간들이,

나에겐 사치인 그 순간들이

사무치게 부럽다.


아니, 그보다 더.

이 각박한 현실을 ‘그런 표현’에 가둬두고

읽는 이가 각자의 열쇠를 찾아 풀어갈 여지를 주는

시인의 깊은 사유에

몸서리치게 질투가 난다.


그에게 현실은 무엇인가.

그는 진짜로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 게 맞는가.


미묘한 기분 나쁨의 원인을

끝없이 찾아 들어가 보면

인정하기 어려운

부러움, 질투를 마주한다.


알아채지 못한 부러움, 질투

그 안엔 언제나

차마 꺼내놓지 못한

이상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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