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갖는 건에 대하여.
시를 즐겨 읽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낀 적이 많다.
저런 애매모호하고 해석이 다분한 문장들 사이에
‘푹’ 빠져들수가 있다고..?
언제나 좀 더 ‘빠르게‘ 읽히는 것
좀 더 ‘강하게’ 터치해주는 것
‘직접적인 지침’을 내려주는 것을 찾아
하염없이 서핑을 하던
‘현실충’이
어쩌다가
‘애매모호한’ 인생 이야기를 마주하기라도 하면
‘에이씨 철학충 또 뜬구름 잡네’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사실은, 사실은.
부러웠다.
그런 애매한 표현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머리에 너무 많은 과제가 산적해
인생을 이루고 있는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어루만지고 숙고할 기회가 없던 나는,
내 마음은,
내 머리는,
애매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그 ‘1초‘가 아까워
‘좀 더 분명한 것‘을 찾아 돌아다녔다.
마음에 빈틈을 허락한 사람만이
‘애매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지적인 수고’는 그들의 특권이다.
그래서 나는 부럽다.
눈으로 시를 읽는 사람 말고
‘마음에서 시가 읽히는’ 사람이 부럽다.
애매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품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 그때 그 말이 이런 뜻이던가’
마주하는 그 순간들이,
나에겐 사치인 그 순간들이
사무치게 부럽다.
아니, 그보다 더.
이 각박한 현실을 ‘그런 표현’에 가둬두고
읽는 이가 각자의 열쇠를 찾아 풀어갈 여지를 주는
시인의 깊은 사유에
몸서리치게 질투가 난다.
그에게 현실은 무엇인가.
그는 진짜로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 게 맞는가.
미묘한 기분 나쁨의 원인을
끝없이 찾아 들어가 보면
인정하기 어려운
부러움, 질투를 마주한다.
알아채지 못한 부러움, 질투
그 안엔 언제나
차마 꺼내놓지 못한
이상이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