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6월 8일. 아빠의 기일이다. 93년 7월 26일 아시아나 항공 733편이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운거산에 추락했다. 그날은 오늘처럼 잔뜩 흐린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가서 싱싱한 병어를 사다가 손질하고 있었는데,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큰 아이 출산 예정일이 일주일 남았는데, 사고 소식에 맘이 무겁고 안절부절 불안했다. 그런데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를 모시고 서울 아산 병원으로 가고 있으니 병원에서 보자고.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위급해서 서울까지 못 오고 천안 순천향 병원으로 갔다고.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비브리오 패혈증이었다. 당뇨도 있었고, 간도 좋지 않았기에 그냥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출산을 앞둔 나에게는 괜찮다고 집에 있으라고 해서 임종도 못 봤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큰 아이를 출산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이 충격이었는지, 자연분만을 하고도 보름이나 병원에 있다가 퇴원해야 했다.
아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아빠의 영정사진은 미처 준비되지 못했다. 군의원에 출마한다고 준비한 인쇄물이 아빠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어두컴컴한 인쇄물이 그날이 기억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간이 좋지 않았던 아빠는 얼굴도 구릿빛이었다. 내가 자식들 챙기듯 아빠의 건강을 신경 썼더라면 알아차렸을 것을.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빠 기일 때마다 엄마가 꺼내놓는 그 영정사진이 영 맘에 걸렸다. 남편은 나보고 언제 장인어른 초상화 그려서 영정사진 대신 사용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얼굴 그리는 일은. 내 얼굴도 아닌 남의 얼굴 그리는 일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 얼굴을 몇 번 그렸봤을 뿐이다.
최근 아크릴 물감에 도전해 보았다. 광택 있고 선명하고, 빨리 마르고, 지워지지 않고, 모든 게 동양화 물감과 많이 다르다. 팝아트식으로 내 얼굴, 남편 얼굴을 그려보았다. 남편이 아주 흡족해했다. 그리고는 다시 장인어른의 사진을 디밀었다. 자기 얼굴처럼 장인어른 얼굴도 그려보라는 것이었다. 아빠 사진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려보았다. 아빠 턱이 뾰족하고 길구나. 얼굴이 뽀얗구나. 눈이 참 선하구나. 사진은 30대의 아빠인데, 내 기억의 아빠는 그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30대 남자의 얼굴은 아니다. 오히려 중년의 남자이다. 아주 오랜만에 아빠 얼굴을 대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