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중국<<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로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 왕의 도발에 재치 있게 대답한 것에서 유래한다. 초나라 왕이 제나라 도둑을 잡아두고는 "당신네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습성이 있다."라고 하자, 이에 안영은 ""귤나무가 회수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지만, 회수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가 된다(橘生淮南則爲橘 生淮北則爲枳)고 합니다.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이후 귤화위지(橘化爲枳)는 사람과 사물이 환경과 토양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차문화
차도 중국, 한국, 일본, 영국으로 전해지면서 각각의 다른 차문화와 차 정신을 만들어간다.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일상의 차를 즐기는 문화로 발전해 왔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이 그것이다. '일상다반사'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처럼 일상의 예사로운 일을 가리킨다. 이 말을 들여다보면 차도 밥처럼 자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밥대신 차를 먹었을 수도 있겠다. 서민들이 식량이 없어 밥을 먹기 어려울 때는 차를 끓여 그것으로 허기를 달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차를 마시다 보니 배가 불렀다. 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했지만, 든든했다. 한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다시마에 칼로리는 없지만, 든든하게 하는 기운이 있다고 하셨다. 꼭 다시마를 먹었을 때처럼 차를 마실 때 든든함이 있었다. 아마 배고픈 서민들은 차를 밥 대신 먹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다반사'는 중국의 차문화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표현이라 생각한다. 중국에는 차에 대한 엄격한 형식이나 규칙이 없는 편이다. 중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육우(陸羽)는 그의 저서 <다경>에서 차의 참된 가치를 '정행검덕(精行儉德)'으로 정리하였다. 육우는 차 마시는 이의 마음가짐을 강조하였는데, 차의 본성은 검소한 것(茶性儉)이므로, 검덕지인(儉德之人)이야말로 차를 즐기는 이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중국에서는 상류계층이 서민들의 차문화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차의 정신
한편, 한국은 차를 깨끗하고 순수한 것으로 인식하여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바르게 하기를 힘썼다. 조선시대 사헌부에서는 다시(多時)를 행했고, 새로 부임한 관리는 다방을 거치도록 하였는데, 이는 차가 깨끗하고 치우침 없는 판단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서산대사는 여러 다시(茶詩)를 통해 차를 달이는 일은 수행자가 평생 해야 하는 일이라 표현했다. 그는 차를 물, 구름, 달에 비유했는데, 물처럼 깨끗하고 구름과 달처럼 욕심 없는 '청허(淸虛) 사상'이야말로 한국의 차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근세 한국의 차문화를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시대 초의선사는 차와 불교의 깨달음이 한 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즐겼고, 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는 중정(中正) 사상을 강조했다.
정약용-초의선사-김정희
조선의 차는 정약용, 초의선사, 김정희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김문식의 글을 직접 인용한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차를 중흥시킨 주역이었다. 유배지 강진에서 신병을 치료하려고 차를 마셨던 그는 다산초당에 정착하면서부터 차를 직접 만들었다. 다산이 이용한 차는 만덕산 백련사 주변의 야생차였는데, 채식 위주의 한국인에게 맞도록 야생차의 독성을 눅이는 제조법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다산이 만든 차는 오늘날 우리가 즐겨 마시는 잎차가 아니라 떡차란 사실도 밝혀졌다. 그동안 다산학의 산실로 알려져 왔던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이 이제부터 우리의 차 문화를 중흥시킨 산실로 조명받게 되었다. 초의 의순은 다산차의 제조법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던 차 박사다. 초의는 다산이 강진을 떠난 이후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었고,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의 부탁으로 시 형식을 빌린 차 이론서인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초의는 이 글에서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차 마시는 절차와 방법까지 정리했다. 그는 다양한 모양의 떡차를 만들고 대껍질로 단단히 포장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초의 차를 전국으로 알린 사람은 추사 김정희이다. 그는 북경에서 완원(阮元)이 끓여준 차의 맛을 잊지 못하다가 초의 차를 만나면서 조선 차에 매료되었다.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보내라는 편지를 여러 번 보냈고, 유배길에 초의 선사가 머물던 대흥사 일지암을 방문한 이후 제주도에서 차를 배달받았다. 추사는 보답으로 글씨를 보냈는데, 일로향실(一爐香室), 죽로지실(竹爐之室), 명선(茗禪) 같은 명품 글씨들은 초의 차를 인연으로 하여 남게 되었다."
일본의 차의 미학
그러나 일본에서의 차는 정신수양의 도구로 발전하여 다도(茶道)라는 차를 마시는 엄격한 법도가 생겨났다. 일본 다도에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모든 만남은 일생에 딱 한 번 있으니,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차를 내는 주인이나 차를 대접받는 손님이나 서로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일본 다도가 추구하는 바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도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다조(茶祖)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을 강조했다. '화'는 '조화', '경'은 '존경'의 의미로, '화경'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서로 존경하고 조화롭게 교류하는 것을 의미하고, '청'은 '맑음', '적'은 '고요함'으로, '청적'은 차를 마시는 사람의 내면과 환경의 고요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다도 철학의 미는 '와비사비'로 함축된다. 센노리큐가 살던 시대는 날마다 싸움이 전개되는 전국시대였다. 이때 무장들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다실에서 침묵을 즐겼다. 센노리큐는 노부가나나 히데요시에게 조용한 다실에서 차를 우리는데 정신을 집중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과 마주하여 정신을 갈고 닦는 구도의 길을 전했는데, '조용하게 맑고 가라앉은 정조, 그것을 즐기는 마음'을 '와비'라 한다. 이에 일본 정원 구석에는 고개를 숙이고서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허름한 다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들어가면서 마음을 겸손히 하고 교제를 나누고자 함이다. 이것이 일본의 차의 미학이다. 센노리큐의 소박한 정신은 팽창주의로 치닫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찰을 일으켰고, 69세에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