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깜지
깜지 뭐 하고 있는 거야?
몇 달째 매달려 그리던 자화상을 바닥에 세워놓았는데, 깜지가 그림 앞에서 열심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그림 속 내 볼에 뽀뽀를 했다. 평소 나에게 하듯. (참고로 깜지의 뽀뽀는 아주 기분 좋을 때 나한테만 하는 걸로 아주 비싸다.) 사진을 찍으려던 순간 벌써 눈치 채고 자리를 떴다. 도대체 인증 사진을 남길 수 없다. 암튼 엄마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하던 해, 깜지도 우리 집에 왔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우연이 아닌 듯하다. 깜지는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그림 그리려고 종이를 펼치고 들썩이고 하면 신이 난다. 아이들도 없는 이 집에서 움직이는 건 나밖에 없으니. 내가 나비가 되고 쥐가 된다. 깜지는 특히 우리 전통 종이 순지를 좋아한다. 비단처럼 고운 순지를 그림 그리려고 펼쳐놓으면 날름 올라가 철퍼덕 앉는다. 그리고 한동안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 시큰둥해질 때까지 관심 없는 척 다른 일 하며 기다려야 한다.
또 깜지는 유달리 붓을 빤 물감이 희석된 물을 좋아한다. 깜지가 좋아하는 건 웬만하면 다 해주고 싶지만, 물감에 카드뮴이든 주사든 독성 성분이 있는 안료도 있기에 그것 만은 막지 않을 수 없다. 얼른 깨끗한 물로 갈아 준다. 자기 물그릇의 물은 먹지 않으면서 꼭 책상 위에 올라와 그림 그리는 물통의 물을 먹는다.
군인은 개를 예술가는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깜지의 시력은 어떤 때는 좋은 거 같은데 또 어떤 때는 눈이 나쁜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지는 자기가 자리할 주변의 환경을 늘 신경 쓴다는 느낌이 있다. 자기가 그 속에 위치할 때 어떻게 보이는지 감각적으로 아는 것 같다. 겨울에 화분을 거실 창가에 들여놓으면 꼭 그 사이에 가서 자리 잡고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는데, 그럴 때면 너무 잘 어울려서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꼭꼭 숨어서 숨은 그림 찾기 같기도 하다. 현관 앞 공용 공간에 산책 나가면 타일로 무늬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는데, 꼭 그곳에 누워 한바탕 몸을 비비고 논다. 바로 위에는 센서등이 있어 깜지가 거기 자리 잡으면 조명까지 비춰준다. 자신이 앉을 곳, 누울 곳의 배경을 고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냥 감각적이다.
그림을 그릴 때, 종이를 찢거나 물을 엎거나 하는 일도 없다. 가끔 물감 접시며 종이며 붓이며 물통으로 가득한 책상에 껑충 올라오는데, 아래에서는 책상 위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한 번도 접시를 엎거나 붓을 건드리거나 종이를 찢은 적이 없다. 그림 그리는 중간에 닭 그림이나 생선 그림이 맘에 들었는지 그 위에 조심히 자리 잡고 앉는데, 물감이 젖었을 때 그런 적이 없다. 게다가 맘에 들게 그려지는 그림에 주로 깜지가 올라앉기 때문에, 깜지가 올라앉으면 이 그림은 잘 완성되고 있구나 생각하면 된다. 완성된 그림을 벽에 세워두면 오다가다 가끔 그 앞에서 유심히 쳐다보는 게 꼭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람객 같다. 아무튼 이런 깜지 덕에 그림 그리는 이유가 하나, 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