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열흘 전이었나, 미국 일리노이 시골 마을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잡게 됐어. 대학 졸업 시즌이라 학교 근처는 이미 만석이고, 어쩌다 보니 시골길로 30분이나 달려야 하는 외진 곳에 떨어졌지 뭐야. 솔직히 처음엔 큰 기대 없었어. 그냥 하룻밤 대충 때우는 거지, 싶었거든. 근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까, 와, 진짜 인상적인 공간인 거야.
한 할머니가 수십 년을 살아오신 아주 평범한 2층집이었는데,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 숙소에 들어가는 순간 뭔가 특별한 감정이 확 밀려왔어. 요즘 말로 하면 '찐 빈티지 감성'이랄까? 방 안에는 색 바랜 나무 서랍장, 오래된 가죽 소파, 철제 침대, 손때 묻은 책들, 그리고 직접 만드신 듯한 커튼이랑 식탁보, 작은 액자 장식들까지… 모든 게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 스며든 듯한 분위기였어.
처음엔 "그냥 낡고 녹슨 건데 왜 이렇게 멋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앤틱, 빈티지, 레트로라는 단어들이 떠올랐어. 비슷해 보이지만 얘네들, 의미가 좀 다르잖아?
앤틱은 100년 이상 된 박물관급 오래된 물건이고, 빈티지는 보통 20년 이상 된, 시간의 멋이 더해진 물건들을 말하지. 그리고 레트로는 과거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요즘 제품, 그러니까 복고풍이잖아. 최근에 유행하는 뉴트로는 복고를 새로운 감성으로 즐기는 트렌드고. 내가 우연히 며칠을 묵었던 그 집은 그야말로 '찐 빈티지'였어.
첨단 시대에 낡은 것에 열광하는 이유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왜 사람들은 AI가 주도하는 첨단 시대에 이렇게 낡은 것들에 열광할까?
내가 생각해 본 이유는 크게 네 가지였어.
첫 번째는 독특함.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물건'이라는 특별함이 있잖아.
두 번째는 시간의 흔적. 상처나 색 바램도 멋으로 느껴지는 그 감성.
세 번째는 스토리. 이 물건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지 상상하게 하는 여운을 줘.
네 번째는 지속 가능성. 버리지 않고 다시 쓰는 가치, 환경 보호의 실천이기도 하고.
여기에 한 가지를 살짝 더 보태자면 누구에게나 있을 옛 시절이 오버랩되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미국은 이런 빈티지 문화가 일상처럼 자리를 잡고 있어. '빈티지 숍'은 물론이고 벼룩시장, 중고거래가 엄청 활발하지. 물건 하나하나에 생명을 오래 주는 문화라고나 할까? 빈티지 가게를 둘러보다 보면 '아니 저런 것도 파네!' 싶은 물품들이 종종 눈에 띄어.
당장 쓰레기로 내버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인데 버젓이 가격표를 달고 매장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까. 감각이 부족한 내가 보기에는 놀라울 수밖에 없지. 괜히 예전에 별생각 없이 내다 버렸던 물건들이 오버랩되면서 입맛을 다시게 되더라.
빈티지 사랑과 재활용 문화의 아이러니
근데 좀 아이러니한 게 있어. 미국은 빈티지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재활용 문화는 상대적으로 훨씬 느슨하다는 거야. 미국 생활 중 가장 놀랐던 점 중 하나가 바로 '분리수거'였어. 플라스틱, 종이, 음식물 쓰레기가 한 통에 섞여 나가는 걸 보면서 "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살짝 죄의식까지… 물론 그나마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고 대도시에서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지만, 여전히 철저하게 분리 배출하는 한국 문화 수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한마디로 쨉이 안돼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미국은 자원이 풍부하고 소비 중심 사회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느슨한 문화가 형성된 반면, 우리는 자원이 부족한 환경에서 아껴 쓰고 재활용을 위해 철저하게 분리수거하는 문화가 정착된 게 아닌가 싶더라. 실제로 외국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감탄하는 부분 중 하나가 우리의 재활용 문화라고 해. 반대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난 이런 결론에 도달했어. 미국인의 빈티지 사랑은 '멋과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한국의 재활용 습관은 '필요와 실천'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결국 두 문화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낡은 것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닮아 있다고 생각해.
우리 일에도 '빈티지 감성'을 입히다
그렇다면 이걸 우리 일에 한번 대입해 보면 어떨까? 지금 우리가 쓰지 않고 묵혀두고 있는 자료들, 예전에 썼던 기획서나 고객 리스트, 몇 년 전 아이디어들… 그냥 '오래된 자료'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 쓸 수 있는 보물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예전 프로젝트에서 지금 활용 가능한 자재나 공간, 반복되는 업무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효율, 혹은 실패했던 아이디어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고.
낡은 것, 지나간 것 속에도 가치가 숨어 있어. 누군가는 쓰레기일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그게 보물일 수 있다는 거지. 이건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도, 경험도, 우리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
오늘 하루, 주변을 한번 둘러보면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 혹은 쓸모없다고 여겼던 것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한번 발견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빈티지 감성의 발견자'가 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