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기억 93 - '참 아름다움'

아픈 가족과 살며 생기는 반짝이는 파편들

by 희망으로 김재식

하늘엔 손바닥만큼의 밝은 곳도 안보이고

캄캄하고 억센 비가 쏟아지는 날

처마 밑에서 젖은 몸으로 떨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꽃 가게에서 나온 남자가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스토브를 켜주고 타월을 내주며

따뜻한 코코아를 한잔 주었다.

그 여자는 고맙다면서 연신 쫑알거렸다.

그러면서 또 미안하다고 했다.


“너무 쫑알거려서 미안해요.

침묵이 무서워서요!“


그 여자는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장미가 없는 꽃 집' 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는 선택의 대상인 ‘침묵’도

다른 누구에게는 피하고만 싶은 무서움의 대상이 된다.

그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흉도 듣고 욕도 먹는다.


그 상대가 누구든 믿는다는 것은,

믿어준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배려다.

그 상대가 나와 기준이 달라서 이해가 안되어 불편할 경우에도

내가 조용히 바라보아 줄 각오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니면 그건 손익을 따지거나 경계를 동반한 거래일 뿐,

단 한 번도 믿음이 주는 평안과 기쁨을 느낄 수 없는

불안의 관계일 뿐


앞을 못보는 줄 모르고 지나치게 쫑알거림에도

그 여자에게 친절을 베푼 꽃가게 남자와

상대가 보이지 않고 공간도 낯설어 침묵이 두려워

쉼 없이 쫑알대며 미안하다던 그녀는 마침내 서로 믿게되었다.


참 아름다움 - 사람은 누구나 배신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다.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가장 잘 믿고 살아준 그대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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