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난 억울하다! 그래도 그러는거 아니지>
...또 샜다. 속옷과 환자복을 적시고 침대시트를 지나 중간방지책으로 넣어 놓은 패드까지 소변이 적셨다. 벌써 3일째, 조금만 움직이거나 힘을 주면 주루룩 소변이 흘러나와버린다. 아내는 이틀까지는 감정을 추스리더니 3일째는 결국 눈물보따리를 쏟는다. 일그러진 얼굴로...
나는 말없이 몇번이나 다 갈아입히고 새로 시트를 깔지만 문제는 힘든 뒷처리보다 우울해진 아내의 상태다. 달래고 갖은 방법으로 괜찮을거라고 해보지만 그게 어디 쉬운일인가? 가라앉은 감정 다스리기가. 나도 억울하다. 암만, 내가 뭘 잘못한거도 아니고 해도 해도 끝도없이 감당해야하는 환자의 오르내리는 감정을 받아내는 일이란게.
예전에 심리상담학과 인간관계훈련 과정을 공부했다는 소위 전문가가 그런 조언을 했다. 갈등과 피로를 주는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참고 참다가는 나중에 모아서 폭발하면 상대방도 나도 모두 망하니까 그때 그때 냉정하게 표현해야한다고. 심지어 늘 참는 스타일의 나를 미련하고 이중감정 위선자라고 날 시퍼런 지적까지 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위선자일까? 한동안 고민도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보낸 내 결론은 ‘지랄, 뭣도 모르는 알량한 지식의 꽹과리...’ 자신을 추스리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고 죽고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돌보면서 “당신이 이러니까 내가 힘들어, 자꾸 이러면 난 계속 이 자리를 견딜 수 없을거야!” 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라고? 그러려면 아예 애당초 옆에 있지도 말았어야 한다. 가족이 죽든지 말든지 단 하루만에 보따리 챙겨 야밤도주하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고 진짜 영리한 사람이다.
병든 가족을 돌보다 힘에 겨워 불행한 끝을 내는 실패의 사례가 참 많다. 그래서? 그러니 애당초 버리고 떠나든지 아니면 인정사정없이 자기보호용 대응을 하라고? 아픈 당사자는 목숨걸고 짜증내고 울고 할퀴는데 성한 보호자의 꼴랑 건강걱정때문에, 억울하지말자고 그런 짓을 하라고?
처음부터 그냥 당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곤 그 억울함과 무거운 감정을 바깥에 나가서 걷고 먹고 소리지르고 물건사고 수다떨고 전부 다른 장소 다른 사람을 상대로 쏟아부으며 살았다. 그 부작용도 만만치는 않았다. 몸은 밤낮 새벽 시간가리지 않고 못자고 화풀이로 먹어댄 결과로 5년만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질환 위염 황달 중성지방과다 고지혈 당뇨 공황장애 심지어 부정맥 심장빈맥으로 응급실을 실려가는 등.
이번에도 달래고 들어주고 기다리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도 힘들다. 나도 다 때려치우고 가고 싶다. 내가 뭔 죄냐?” 이 한마디를 목을 넘어오지 못하게 혀로 틀어막고 버티다가 한계가 오고 있었다. 방학이라 집에 와있는 막내딸을 불러 곁을 지켜달라고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1시간여, 숨쉬고 걷고 마구 이것저것 쓰고 노래듣고... 그리곤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 원위치에 앉았다. 보호자, 가족이란 그런거지 뭐 어쩌라고.
그래도, 그래서, 정말 고맙다. 세상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소화하고 도로 삼키고 생을 사신 분들이,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억울함을 비길 사람이 있을까? 인류를 사랑한다는 죄 아닌 죄 하나로 죽음의 길을 묵묵히 끝낸 그리스도. 그 덕분에 우리의 고통이 최악이 아니고 끝장이 아니고 나는 덜하지 라는 안전지대 쿠션이 생겼으니까. 막다른 철조망 대신 포근한 위로의 품이 나를 둘러싸니까.
밥먹고 일하고 자고, 밥먹고 일하고 자고, 밥먹고 일하고 자고... 누구는 그 생활이 지겹다고하고 누구는 그 생활이 꿈에도 눈물로 비는 소원이 된다. 죽음을 진단받은 암환자들과 손발을 꼼짝못하는 재활병원환자들이 하나같이 부러움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그 지겨워 못사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들의 일상이다. 나도 종종 눈물로 꿈을 꾼다. 얼른 그 지겨운 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으면 하고.
누구는 인생이 힘들다하고 누구는 달콤하다 하지만 나는 인생이 서럽다. 남탓도 해보고 무능한 내탓도 해보며 살아왔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건 별거아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하루도 어김없이 해는 지고 노을길에 그림자 길게 남기고 모두들 돌아갔다. 집이 있던지 없던지 다들 귀가를 하고 내게는 이별의 흔적만 남겼다. 어느 날에는 나도 그러겠지? 누구에겐가 흔적만 남기고 소멸의 세계로.
하늘을 목놓아 부를 기운도 없어지면 원망도 소멸할까? 온갖 종류를 향한 체념들이 가져오는 빈 공간의 침묵이 아이러니하게 평안을 가져온다. 어떤이는 체념은 복수단어가 아니니 단수형 어미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를 스쳐간 체념이 한가지도 아니고 한 번도 아닌데 단수로는 못쓰겠다. ‘체념’이 아니라 ‘체념들’이라고 쓰고싶다.
겨울을 넘겨본 나무들만 기억하는 생존법칙은 그렇다. 가을이 오면 잎은 떨어뜨리고 물은 최소한으로 먹고 과하게 성장하지말 것, 등. 제 어미의 희생으로 만든 퇴비를 먹고 새 잎과 새 가지는 봄이오면 새끼처럼 살아난다. 어쩌면 죽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모양을 바꾸어 어떤 생명에 흔적으로 남는지 모른다. 한 해 두 해 십년 백년도 그렇게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내가 망쳐 놓은 인생 고난의 수렁에서도 열심히 앞으로 바퀴를 굴려가며 여기까지 왔다. 버티고 탓하지 않고 하루씩 사는 본을 보인 것에 대한 대가? 분명 어딘가는 그늘지고 상채기 딱지를 달고서도 안그런 아이들처럼 씩씩하게 사는 아이들. 어딘가 나와 아내의 고통과 순종이 흔적으로 담겼을 아이들이 우리나무의 새 잎이고 새 가지일까? 주어진 삶이 억울해도 나만 살자고 되 갚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바라고 하늘이 돕는 인생의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