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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Jun 01. 2020

나도 누군가에게 박힌 가시로 사는 중일까?


'왜 잠잠히 사랑하시는걸까?’

휠체어에 실린 사람들,
코에 호스를 꽂고 테이프로 이리저리 붙인 사람,
수액이랑 항생제, 수혈중인 혈액봉지까지 링거에 달고
그야말로 부상자 집단같은 모습의 병원예배 구성원들
여기저기서 울음을 참느라 흐느끼는 소리
아슬아슬 굵은 동아줄도 아닌 가는 실자락을 잡은 듯 다급한 기도소리
그저 멍하니 표정없이 앉아 있는 사람...
병원 간이 장소에 마련된 예배실 참석자들 분위기다.
이 패잔병 같기도한 무리들을 데리고
하나님은 무슨 큰 전투라도 치를 작정하신걸까?

“아부지, 이거 아무리 보아도 좀 무린데요?”
걱정스런 질문인지 의심인지 저절로 새어 나온다.
뭐 힘센 사람도 안보이고,
행색이 좀 넉넉한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신념에 찬 일당백의 전사같아 보이지도 않고,
하긴 내 교회출석 경력에도 삐까번쩍하는 큰 교회는 도통 없었다.
오래전 80년대 청년기에 다닌 상계동 교회는 맨 철거민들 투성이로
밭에, 벌판에 가건물로 만든 비닐하우스 집에서 사는 사람도 많았다.
거의가 그날 벌어먹는 행상에 날품팔이 생활이 대다수 였다.
우편배달을 하시는 분이 교인들에게 가장 부러운 직장인이었으니...
결혼시기 때 다닌 안산교회는 외국인근로자와 노동자들이 주일마다
걸핏 해고와 실직, 부상으로 돌아가며 한숨짖고 울기 일쑤였다.
마지막 교회가 된 아내가 아프기 전 십여년 넘게 다닌 시골교회도
늙어가는 인생의 신앙마무리를 지켜보는 무기력의 배움터였다.
반년쯤 머물렀던 기도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신적 문제와 질병,
혹은 사람사이의 갈등으로 온통 힘들어하는 사람들 투성이였고,
이후 떠돌며 드린 여러 병원 예배에서조차 대부분 지치고 망가진,
정말 용맹한 주의 군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하기사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도 뭐 별 다름이 있었던가?
힘없고 약하고, 가난하고 죄투성이에 권력도 없고,
내일의 희망조차 없기 십상인 무리들이 아니었던가?

어떤 것이 쉬울까?
어떤 것이 더 힘들까?
천둥 번개와 함께 한번에 쏟아붓다가 딱 멈추는 폭우와
밤낮 석달 열흘 넘도록 때도 시도 없이 추적추적 오는 장마비,
그 두 가지 중에...
신앙의 위기는 두번째 경우가 더 어렵다는 경험을 하고 있다.
한번에 우당탕! 죽든지 살든지 결판나버리는 전쟁이 쉽다.
24시간, 일생 동안 치르는 잦은 전투를 견디는 것은 지친다.
야금야금 마음에 스며들어 불안과 외로움을 일으키며
미움과 욕심을 자라게하는 유혹과 싸우는 장편드라마는 정말 힘들다.
사랑으로도 해결이 안되는 질긴 투병, 생존의 전투란...

오늘 주일예배에 주신 말씀은 이랬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 스바냐 3장17절.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고작 ‘잠잠히...'란다.
왕창!도 아니고 요란벅적! 도 아니고 잠잠히.
그런데 자꾸 되묻다보니 동의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일생을 한시도 눈떼지 않고 해주실 사랑은
'잠잠히'가 맞다. 그말씀은 '변함없이' 라는 의미도 담고 있기에.
남의 눈을 의식한 보이기도 아니고, 주는 사람 기분내는 그런 것이 아니고,
가장 하나님 답게 기쁨을 참지 못하며 줄 현명한 사랑이 맞다.

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최고 부자로,
모든 사람을 최고 꼭대기에 안 올리시는지 조금 이해한다.
어쩌면 하나님의 철칙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주면 가까이 오지않고 멀어질 사람에겐 절대 안주신다.
안줘야 더 깊어지고 더 강하게 살 자녀에게도 절대 안주신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의 잔을 피해서 넘어가게 하지 않았고,
바울에게도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주지 않았고,
숱한 장애와 질병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힘을 더욱 증거할 사람들과
끝까지 죽음을 기어이 받아들일 순교자들에게는 아무 기적을 안주셨다.
힘 없어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늘 이 구절 하나가 계속 마음에 따라온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 스바냐 3장 12절
문득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으로 남들 가운데 남겨진 사람인가?
누군가에게 박힌 가시로 사는 중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역할이든 모두 하나님의 그림 속 하나의 피사체일테니 뭔 상관일까만.

“주님, 저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다음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
하여 지금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임을 절망하지 않으며,
지금 아무 기적도 회복도 없이 그저 살아가야할지라도
오히려 은총으로 받아들일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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