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고등학교 절친 집에서 초대받은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배웅을 받으며 아내는 몇 걸음 앞에서 정원의 계단을 내려 걸어가고 있었다.
“난 아내에게 올해는 뭔가를 해주려고 해!”
“뭐 해줄건데요?”
“아내가 결정하는 것 뭐든지! 공부를 하든지 긴 외국 여행을 하든지,
아내가 원하면 이혼도 해줄 수 있어! 아무 눈치도 제약도 받지않고
자기 하고싶은 뭐든지 하도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다면 그것도 포함해서!”
아내의 친구는 좀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 진심은 그랬다.
그럼에도 아내가 나를 선택해서 사랑해준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그러지 않더라도 삼십년이나 내곁에서 살아주며 나를 사랑해줘서
정말 고맙다. 내가 해준 것보다 갑절은 더 많이 나를 위해주었다.
우리를 알고 눈치가 빠른 분은 이상한 걸 발견했을거다.
‘몇 걸음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맞다. 이건 간밤에 내가 꾼 꿈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도 깨고나서 너무 마음 아프고 꿈같은 장면이었다.
가을 프렌치 코트를 입고 친구집 정원의 돌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아내...
그러나 현실은 꿈속의 아내와는 달라졌다.
아내는 자유를 주어도 이제는 날아가지 못하는 새가 되어버렸다. ㅠㅠ
오십이 넘어가면 아내들에게는 새로운 선택이나
성경의 희년에 해당하는 자유를 주고 필요한 전적인 지원을 해줘야 한다.
특히 남편이나 아내의 부모, 자녀들도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한다.
아내는 참 자유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제대로 살 기회가 없었다.
어릴 때는 부모의 보호와 바람을 따라 자기 뜻대로만 살지는 못했고,
성인이 되어 나를 만난 아내는 빠른 결혼을 한 후에는 또 의무들에 매였다.
아내의 자리, 며느리, 안주인의 자리, 아이들의 보호자 양육 책임자로.
물론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자신만을 위해
어떤 지출도 시간도 내어 살 수는 없었다.
양심이든 책임이든 무슨 이름이 붙어 감수하고 양보하고 타협을 하며 살았다.
그러니 자녀가 성인이 되는 오십을 넘어가는 즈음에 그 모든 의무에서
한 번은 풀려나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필요한 시간과 비용과 배려를 받으면서 말이다. 내쫓겨나는 것이 아니니까!
다시 가장 최선의 선택, 최고의 행복이라고 결정을 하고 가정을 지킨다면
그건 이전의 의무와는 분명 얼굴빛과 기분이 다른 삶이 될것이다.
아니고 다른 생활방식을 걸어간다면 그 또한 자유의 날개를 단 비행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지?
아내는 풀어주어도 날아갈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날개가 부러지고 걷지도 못하며 혼자서는 생존도 못하는 처지의 환자로...
너무 늦은걸까?
주고 싶었던 자유를 누릴 수도 없게 된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다.
나는 대신 내 삶을 포기하고 순전히 아내만 돌보는 생활로 보상해보지만
그것으로 아내가 희년의 해방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제2의 인생이 되지는 못한다.
누구의 저주나 무슨 죄로 인한 박탈일까? 나 때문일까? 아내 때문일까?
예수님은 날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아내도 그럴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러면 뭐하나? 자유를 주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는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