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망으로 김재식 Nov 09. 2019

살아도 죽은 사람처럼 된 날

사람은 늘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 전신마비 바로 직전의 평안 두 번의 재발로 응급실을 다녀온 후 강남S병원에서 재활할 당시. 저 때만 해도 사지마비의 긴 투병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오늘 많이 무섭네, 같이 좀 있어줄래?"

"그래요, 걱정 마세요 같이 있어주지요 뭐!"

"고맙다, 내가 애들도 아닌데 왜 이리 두려운지."


그렇게 그 친구는 문병을 왔다가 덜컥 잡혀 병원 휴게실에서 밤을 꼬박 샜다. 충주에서 몇 군데나 병원을 옮겨 다니며 거의 송장에 가까울 만큼 지친 아내를 이곳 강남S병원 응급실에 실어다 놓고 나니 그제야 두려움이 몰려왔다. 여러 번의 대수술, 그동안 감당해야 할 병원비용, 버려진 논밭처럼 방치될 아이들.


가끔 사람과 하늘이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햇빛 나고 비 오고, 구름에 흐리다가 바람 불고, 자연은 그 반복 사이에 생명을 키우는데 사람은 그 반복 사이에 인내와 겸손을 키우는 것 같다.


건대 부속병원에서 소견서와 MRI 시디를 받고 퇴원하고도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다는 낙심이 내 발을 묶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13일을 집에서 밥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하고, 물도 먹었다하면 토하는 날들을 보냈다. 종이컵을 다발로 놓고 한번 토할 때마다 휴지 한 장을 입 닦고 컵에 넣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해내는 건 끈적거리는 위액과 침, 쓴 물뿐이었다.



그래 이러다 그냥 죽을지도 모른다. 이게 운명이라면.


자포자기하고 있는데 형제들이 들이닥쳤다. 큰 형과 동생이 차례로 서울 수원에서 내려왔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내게 돈을 쥐어주면서 무조건 큰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라고 야단을 쳤다. 일단 검사하고 수술부터 하고 다음 병원비랑 생활대책을 세우면 되지 사람을 멀쩡히 잡아놓고 죽이려고 한다며 다그쳤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무엇에 홀렸다 깬 것처럼 미안함이 몰려왔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죽어가는 걸 손 놓고 보려고 했다니. 끔찍한 마법에 걸렸나 보다. 그렇게 올라와서 응급실에 아내를 넘기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내일부터 생길 일들을 어찌 다 감당하나 싶어서.


그때 마침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오랜 믿음의 친구가 고마웠다. 나이는 나보다 적어도 언제나 든든한 친구, 프랑스 떼제 공동체와 유럽 수도원 탐방을 같이 다닌 친구였다. 한 번은 많이 섭섭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 떼제에 머물면서 애당초 계획한 일정이 어긋나면서 우리를 초대해준 분에게 나는 많이 서운해 있었다. 오랜 세월을 같이 마음과 생활을 나누어 왔던 사이인데도 서로 원하는 일정이 달랐는데 그 다른 생각의 공간 중간쯤에 그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 친구가 나와 같이 서운한 마음을 품고 내 편이 되어주겠지 했다.


하지만 예상을 빗나가 그 친구는 집요한 나의 비난성 불평에 단 한 번도 동조를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쪽에서 내게 충고를 하거나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 뒤로도 며칠은 몹시 힘들어하는 내 옆에 있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후에야 나는 알았다. 그 처신이 얼마나 모두에게 고맙고 어른스러운 행동이었는지를! 그 덕분에 잠시 서운했던 존경하는 분과도 다시 풀렸고 귀한 경험을 했다.


함부로 한쪽 편을 들거나 험담을 같이 하는 것은 소중한 사람들을 작살내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 물론 어설픈 충고나 외면도 마찬가지.


"나 사실 두려워, 무섭고 자꾸 악몽을 꾸면서 가위에 눌리네, 바보같이. 괜찮으면 나와 같이 좀 있어줄래?"

"그럴게요. 같이 여기서 자고 아침에 바로 출근을 하지요 뭐!"


그제야 나는 마음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졸아들던 압박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이도, 오랜 신앙훈련도 무색해진 민망한 순간들이었다. 척수종양진단을 듣고 신경과 과장실을 나오며 후들거리던 걸음도 기억났다. 하루 종일 두통으로 통틀어 한 시간 이상을 못 자고 비명을 지르며 끙끙 앓던 아내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순간과 그 힘들었던 날들이 나를 위축시켰나 보다. 형편없이 무기력하고 두려움에 찌든 소심한 사람으로.


- '종양보다는 다른 쪽 같다'는 의사 말에 환호,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런데 새벽 동이 트고 신경외과 선생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사진 판독만으로는 종양보다는 다른 쪽 같습니다. 그래서 신경외과에서 신경과로 전과를 해서 다른 검사를 좀 더 해봐야겠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목 척수 부분에 사진 나온 것이 종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믿기 어려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다시 여쭈었다. 대답은? 그럴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어렵다는 목 척수 신경다발을 헤치며 해야 하는 수술, 50% 가까운 수술 후유증으로 대부분 마비가 온다는 데 그걸 피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최소한 서너 번의 수술실 출입과 회복기의 무서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기적 같은지!


그런데 그게 90% 넘게 치료 수단도 없고, 차라리 수술이라도 해볼 수 있는 병이면 더 행복하겠다. 나중에 그렇게 몸서리치며 오래 고생할 줄은 그 당시에는 까맣게 몰랐다.

(두 번 재발로 응급실로 실려 오고 난 다음에야 내려진 진단은 '희귀난치병' 데빅씨병. 시신경척수염으로 보통 '다발성경화증'이라 부른다. 한번 재발할 때마다 장기 하나씩 마비시키는 무서운 후유증 탓에 열 번이 넘게 오는 동안 아내 몸의 중요한 곳이 하나씩 정지됐다. 소변과 대변을 관장하는 방광과 대장까지 마비시켰고, 숨을 쉬는 폐까지 한쪽을 무기 폐로 만들었다. 그러다 마침내는 목조차 들지도 돌리지도 못할 만큼 전신 사지마비가 되고 말았다)


보통증상이 나타난 환자는 생존율이 25년,
사지마비와 같은 심한 증상의 환자는생존률이 5년 정도.
브리테니커에서 친절히 설명을 했다.
아내는 벌써 발병 12년째이다.
사지가 마비되고 폐까지 한쪽이 마비되고
대소변 신경도 모두 마비되었다.
그러나 통계는 어디까지나 통계이고
사람의 생명은 의술만에 달려 있지는 않다.
그보다 빨리 사망하는 사람도 있다면 그보다 오래 가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오히려 문제는 환자나 가족이 견디고 버틸수 있는지가 더 어렵다.
추락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인내심,
예민하고 불안해지는 심정으로 빚어지는 갈등
그리고 늘어가는 빚, 치료비용....
오히려 이것들이 더 무서운 상대가 되기도 한다.
보통 온갖 종류의 난치병과 말기 암 등 심한 중병이 다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날에 오는 불행은 더 어둡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