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과 결혼기념일에 받은 악몽이 담긴 선물
"이번 생일 선물은 뭘 해줘야 하지?"
"……."
2008년 5월 9일, 막내 딸아이 12살 생일날 아침이었다.
막내딸은 한 달 전, 양궁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거짓말 같은 전국대회 초등부 여자부 금메달을 따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도 금메달 4개 중 3개(개인종합, 20m, 단체전)를. 그리고 남은 하나 30m에서도 동메달을 따서 사실상 4개 종목 전체에서 메달을 땄다.
위로 2년 터울로 아들 둘 낳고는 결혼 전 연애 시절부터 떼(?)를 부리던 예쁜 딸을 얻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반지점인지 뭔지로 우리 집엔 아들 둘 밖에 없다고 세뇌를 시킨 공동체 식구들의 돌팔이 점을 눈물을 머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녀 교육비를 감당키 어려운 시대니까.
그러다 기적같이 7년 만에, 둘째 아들과 만 6년 터울로 아이를 가졌다. 모두가 배의 모양이나 하는 짓이 아들이라는 말에 남몰래 긴 한숨을 쉬다가 로또보다 큰 대박을 맞았다. 출산 후 문을 열고 나온 병원 간호사가 애매한 목소리로 '딸이네요' 하는데 다시 물었다.
"예? 뭐라구요?"
"…딸인데요?"
딸아이의 생일에 들뜬 날... 아내가 아팠다
"따로 뭘 해주지도 못했는데, 생일겸 한 번으로 떼우지? 흐흐!"
"……."
"저녁에 맛있는 외식을 시켜주는 걸로 할까? 피자나 뭐 그런~"
"…나 목이 아프네."
여자들은 자주 아프다. 특히 아이들 둘 셋 낳고 키운 주부들은 더 그러려니…. 흘려들으며 건성으로 한 마디는 했다.
"약국 가서 약 좀 사먹어! 병 키워서 애먹이지 말고~"
"……팔도 저리다."
'무슨 사오정 패밀리도 아니고 동문서답이야? 에이그…' 속으로 중얼중얼. 아침이면 시계추처럼 출근하는 일터로 나가면서 또 한 마디 했다.
"이따 나눔이 생일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 전화해 줘!"
종일 전화가 없다. 퇴근 후 돌아온 집, 아침보다 더 절절 매는 표정으로 목과 팔을 주무르고 끙끙거리는 아내.
"병원이라도 가보지, 왜 그러고 버텨…."
하루의 저녁이면 으레 조금씩은 지치는 가장들처럼 내 목소리엔 약간의 짜증이 섞였다. 말도 없이 이부자리 깔고 돌아누워 있는 아내를 향해….그때, 나는 몰랐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무엇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지 전혀 몰랐다. 아내의 그 통증이, 장차 재산이고 집이고 모든 것을 날려버릴 줄 몰랐고, 아이들의 장래마저 휘어지게 하는 시작점인지 전혀 모르고, 별 위력도 없을 일감 걱정에 심각해 있었다.
아내의 "끙끙…" 소리, 그 소리는 가는 끈처럼 사소해 보였지만 뒤에 매달려 있는 것은 핵폭탄이었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사는 남편이라는 나를 죽음에 가깝도록 몰고 갈 핵폭탄….
매년 결혼기념일엔 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우와~~ 누구…세요?"
"탤런트 같다! 진짜 이쁘다!"
멀리 안산에서 축하를 해주러 결혼식장에 온 팀들이 아내를 보고 한 마디씩 했다. 하긴 그다지 미모가 뛰어나지 않아도 화장을 하고 하얀 드레스를 입으면 다들 천사 같아지는데, 아내는 원래 이쁜 외모에 그리 심하게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에 워낙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조금만 했는데도 너무 달라보였다. 뽀얀 뺨, 짙은 눈썹, 빨간 입술, 초가을의 푸른 하늘과 너무도 어울리는 맑은 신부였다.
결혼 20주년.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사람들이 부여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 애써 별 일 아니라고 줄여보아도 아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초가을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정원을 걷던 모습이 자꾸만 황홀하게 떠오른다.
20년 전 그 날 9월3일, 종로5가 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서 아내는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으며 화장 때문인지 크게도 웃지 못하고, 누구나 일생에 몇 번 없을 자신이 주인공이 된 날의 행복을 감추지도 못했다.
사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살고 싶었다. 그것은 무슨 큰 철학이나 독신주의가 아니라 내 처지와 내 능력을 감안한 결심이었다. 죽자 살자 돈을 모으는 성격도 못되고 아무리 해도 버는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고 다른데 정신이 팔리니, 나 같은 사람이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면 그 가족이 얼마나 위태로울까? 단지 그 이유로….
그러나 요리조리 피하던 그 말도 안 되는 도망은 아내를 만나면서 깨졌다. 처음 단 둘이 만난 자리에서 3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끝 무렵에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랑 결혼해줘!"
당연히 아내는 주저하였다.
"…그럼 난 다시는 안 만날래. 내가 서른 가까운 이 늦은 나이에 스무살 갖 넘은 사회 초년생 아가씨를 연애나 하자고 만나는 건 좀 양심에 걸려서…."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아내는 다음날 내 사무실로 쳐들어왔고 문을 닫고 항의를 하였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해달란다고 예! 하나요? 너무 하잖아요!"
그래서 두 번째 바깥에서 만난 자리에서 아내는 결혼을 승낙했다. 단 두 번의 만남에서~.
결혼기념일에는 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형편대로, 멀거나 가까운 곳이라도… 첫해는 설악산에 콘도를 예약하고 승용차를 렌트해서 2박3일을 다녀왔다.
한 해를 건너서는 경주에 들러 동해안을 일주하면서 또 3일을 다녀왔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런 저런 이유로 발목이 잡히고 서서히 약속은 바래지고 현실에 묻혀 서로가 따지지도 않고 변명도 안 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이벤트도 없이….
4개월 동안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검사만 받던 아내
벌써 4개월 가까이 아내는 계속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검사와 치료, 입원과 또 검사… 계속 그러는 중이었다. '올해 결혼기념일은 아내와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동안 부려만 먹은 게 너무 미안해서, 몇달째 통증과 싸우느라 온통 회색빛 우울증이 걸려버린 아내가 딱해서….
비용과 일정에 대해선 말도 안 하고 속으로 준비하는 중에 아내가 점점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뭐, 예전에도 응급실로 갔다가 회복되어 다시 살림살이에 복귀하고 했으니 이번에도 그러겠지.'
회사에도 미리 허락을 받고, 속으로 부디 피치 못할 일거리가 안 생겨야 할 텐데 하는 기원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우리가 없는 2~3일을 잘 챙겨먹고 살겠지? 설마 엄마 없다고 굶어죽기야 할라고…. 정말 아내를 위해 따뜻하고 편한 추억에 남을 만한 시간을 보내야지! 맘 속으로 다짐했다.
며칠 입원해서 MRI와 피 검사, 다른 검사를 한 신경과 과장님이 가족을 부른다고 했다.
'… 그런데 왜 가족을 한 명 더 데리고 오라고 하지?'
좀 궁금했지만 뭐 으레 병원들이 하는 절차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둘째 아들을 동행해서 의사 선생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형광등이 비추는 벽면에 사진들을 걸어놓고, 컴퓨터모니터에는 머릿속을 보여주는 MRI 화면을 띄워놓고 선생님은 이런 저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따라 듣기에도 낮선 용어들이었다. 문제는 결론 부분이었다.
"척수종양 같습니다. 악성인지 양성인지 우리 설비로는 구분을 못하겠네요. 4대 종합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목 척수 속이라 그곳 밖에 못하기 때문에…."
멍해진 순간에 아내와 나의 결혼기념 여행 나들이는 하얗게 된 상태로 어디론가 가는 잔상이 되었다. '뭘 해야 하지?' 말이 없어진 내게 둘째 아이는 위로를 했다.
"양성일 수도 있다잖아요. 기운을 내요 아버지!"
1988년 9월 3일 결혼, 고생길을 걸어와서 도착한 2008년 9월 3일,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이런 선고를 선물하다니, 미안하게도….
나중에 아내는 희귀난치병으로 밝혀지고, 그 진단서에는 발병일이 적혔다. 2008년 5월 9일! 하늘의 선물이라고 기뻐했던 딸아이의 생일날이… 그리고 아내와 결혼한 기념일은 가정을 파산시키는 끔찍한 진단이 내려진 악몽의 날이 되고 말았다. 행운과 불행은 한몸으로 껌 딱지처럼 붙어 있음을 뼈저리게 배웠다.
그후로 다시 10년이 더지나고 맞이한 아내와의 결혼기념일. 나는 여전히 못난 남편이었다.
'그때 그 날은 햇살도 좋았다'
31년 전 오늘,
서울올림픽이 열린 그 해 9월3일.
나와 아내는 종로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가을하늘을 같이 느꼈다.
아내는 면사포를 쓰고 빨간벽돌 정원과 강당에서 사진도 찍고.
그렇게 결혼식을 치르고 31년을 같이 살았다.
온갖 곳을 같이 가고
온갖 일을 같이 겪고
웃을 때도 같이 울 때도 같이 동행했다.
아내의 곁에는 늘 내가 있었고
내 곁에는 아내가 늘 함께 있었다.
종일 비가 뿌리는 오늘을 병실에서 거의 다보내다가
아내를 데리고 미용실을 가서 머리도 자르고 염색을 하고 왔다.
꼭 일주일 후 막내딸아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간다.
아이 친구들에게 너무 누추해보이지 않으려고...
안그래도 휠체어에 소변주머니도 차고 가는데 늙어보이기까지 하면 그렇다.
미용실을 다녀오자마자 나를 기다리는 건 결혼기념일의 멋진 식사도 아니고
주고받는 선물을 풀어가며 지난 날을 감사하는 시간도 아니고
밀린 설거지와 아내의 치료시간에 필요한 준비를 해야하는 간병 잔일들이다.
하루가 이렇게 다 가는데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우리를 맺어준 신의 의도는 무엇일까?
몰래 숨겨놓은 이벤트같은 깜짝 사랑은 혹시 없는걸까?
그저 30년이 넘도록 서로를 섬기고 돌보다가 생을 마치고 돌아오라는
미션만 주어진걸까?
좀 야속하다... ㅠ
어떤 부부는 멋진 노후도 주시면서 우리에게는 왜?...
어서 오늘이 가고 아무 날도 아닌 내일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아무 날도 아닌 날에는 덜 서운하고 덜 외롭고 덜 야속하겠지?
결혼기념일 31주년의 저무는 오후 해도 없고 비만 후두둑 창을 두드린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글을 다시 정리하고 추가하여 작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