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도 좀 덜 슬플 때 나오는 것, 너무 아프면 사랑도 사랑이 아니라고 어느 시인도 말했다.
고통도 너무 심하면 단지 비명을 지를 뿐이다. 그리곤 이어 두려움과 허무로 생명의 기운이 반쯤 넘게 빠져나가버린다. 살아 있지만 죽은 존재처럼, 죽은 자에게는 없는 고통은 남아 흐르는 고문...
“사내아인 죽여라! 한 살, 아니 두 살 아래로...”
“아기들이 죄를 지었다고요?”
“탄생한 죄, 새 별이 된 죄!”
“이곳은 내 세상이다! 꼬마와 나눌 순 없어, 죽여! 죽이라니까! 모두 죽여 버려!”
그렇게 참살의 피비린내가 거리 성읍을 뒤덮었다. 언젠가 일어났던 악몽이 다시 재생되었다.
단지 탄생한 죄로 무참히 창칼에 살육을 당한 일, 모세가 태어나던 때에도 그랬었다. 모든 사내아이들이 몇 살 아래는 모두 죽어가야 했던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죽음의 광란.
이유도 같다. 권력을 잃을까봐 불안해진 왕들의 등 뒤에서 속삭인 악마에게 넘어 갔다. 요셉이 사라진 후 애굽의 바오로 왕이 그랬고, 이스라엘의 헤롯왕이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반복되는 욕망의 비극, 정말 인간이 된 사실 때문에 나 자신도 때론 역겨워지는 본성....
아기를 품에 안고 골목을 돌아 숨으러 가는 어미들, 그 뒤를 창칼을 들고 달려가는 말 탄 병사와 멱살을 쥐는 군인들, 눈앞에서 순식간에 토막이 나는 어린 아이를 잃은 여자들의 비명이 하늘로 사무친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참혹한 사실에 반쯤은 실성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벽에 철퍼덕 던져진다. 땅바닥에 꼬꾸라진다.
하늘이 없어졌다. 땅도 없어졌다. 이것이 어찌 세상이고 삶이랴. 진도의 하늘에 애굽의 하늘이 겹치고, 이스라엘의 하늘이 겹쳐졌다. 수긍할 이유도 없이, 순식간에 가족을 빼앗긴 사람에게는 울 자격도 없는 것일까? 팽목항의 부모에게는 죄가 없다. 아니다 자식을 잃은 엄마는 죄인이다.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한 사람이 그랬다. 한 랍비가 말했다.
“탐욕이 날뛰도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 졌도다.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
맞다. 그 모든 살육의 반복 뒤에는 공통적으로 탐욕이 날뛰었다. 권세를 지키려는 왕들의 욕망, 돈을 더 벌기 위한 선박회사와 뇌물, 승진에 영혼이 팔려버린 장사치와 관료가 있었다. 이기는 자 힘센 자의 편에 서려던 언론 방송조차 탐욕의 줄에 서버린 바람에 자식을 잃은 어미들이 위로 받기를 거절해야만 했다.
‘이미 강제로 가족을 상실당한 어미들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무기력함과 죄인 된 심정 때문에 ’없는 자‘가 되었다. 영혼도 슬픔도, 자식도 없어진 ’없는 자‘ 그러니 위로받기를 거절할 수밖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통이 온 하늘을 채우고 다시는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땅은 비틀거리면서 다리를 받쳐주지 못했다.
‘헤롯왕이 죽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애굽의 바로왕도 죽었고 헤롯왕도 죽었다. 세월호 침몰로 여럿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 사람 단체도 있고 앞으로 죽어갈 대상도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그 포로됨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 희망을 주었다. 사실 이루어지기도 했다. 애굽의 비극은 모세를 남겨 출애굽으로 이어졌고, 이스라엘의 살육은 예수를 피난시켜 계획대로 부활로 이어졌다.
세월호 침몰의 비극은?
그 유가족들을 단합시키고 같이 울어주는 이웃과 국민을 남겼다. 앞으로 무엇을 고쳐낼지는 더 두고 보아야 겠지만 숱한 부패와 조작과 비겁함들을 수면위로 드러내게했다.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희생된 이들을 위로한다. 악마의 부추김으로 욕망이 잉태되어 죄를 낳고, 자라서 사망을 부른 사람들, 그들과 비슷한 본성이 내게도 구석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고백을 경계로 삼는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 예레미야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