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너희를 구했으나 너희가 배반하도다!”
그랬다. 인류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 사람이 자연을 배반하고 사람이 사람을 배반하고, 마침내는 사람이 하나님도 배반하였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배반했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노아의 홍수 때 그랬고, 어느 민족은 이스라엘에게 아이와 여자 가축까지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면서, 또 출애굽때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수백만이 수장을 당했다고도 했다.
최근에는 히틀러가 600만이 넘는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냐고 원망을 했다. 신은 죽었다고도 하면서...
그러나 정말 그럴까? 애당초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거의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다면 그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기나 했을까? 죄조차도 스스로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았다면 그 모든 일들의 원인이 된 불의와 폭력과 군대와 명령조차 있었겠는가?
배반이 맞다.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고 아름답게 살라고 했던 창조자의 바람을 무참히 뭉개버리면서 출발한 사람의 배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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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돌아오면 나도 네게 돌아가리라!”
세례요한은 그렇게 심부름 전달자로 하늘의 심정을 전했다. 그러나 돌아온 자들이 문제였다. 진심으로 돌아왔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겉으로만, 혹은 다른 이익에 욕심을 품고 눈길을 기웃거리는 가짜 귀환을 한 종교인들이 더 큰 문제였다. 그들은 자기들만 이중 삶을 사는 것이 찜찜하여 많은 선량하고 단순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였다. 마치 복제를 하듯...
“성전에 감으로써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헛된 제물을 바치지 말라!”
“양의 피 따위엔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회개를 원하신다!”
세례요한은 오랜 세월을 두껍게 덧칠해진 그 거짓들을 지적했다. 벗겨내고 벗겨내고, 다 벗겨내어 속살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종교장사치들은 너무 완강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잘 굴리는 혀와 번듯한 외모,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논리로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구원의 길을 모르는 줄 아슈?”
‘나의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 고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그들은 두꺼운 방패를 내밀었다. 그 사이로 찌르는 창을 번뜩이면서,
“당신만큼 율법도 알고 지키려 하고 있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항상 율법을 지켜 왔소!”
늘 그랬다. 겉으로 심판할 수 있는 주일 지키기, 수로 집계되는 헌금, 보여지는 거룩한 모습, 명성을 보장하는 직위 감투 호칭들, 그런 것들로 그런 것을 따라갈 수도 없는 낮고 가난한 이들을 짓눌러왔다. 그들에게 부끄러운 죄인들이라는 단죄를 쏟으면서, 보이지 않고 수량화 할 수 없는 따뜻함이라거나 자비, 배려, 그런 건 도무지 관심 밖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평신도들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고, 혹시 알아도 넘기 힘든 높은 벽이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에게는 그런 속임수들이 통하지 않았다.
“경건한 체 하는 자들이여! 회개의 열매를 가져오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신다!”
오히려 낮고 천한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면서 세례요한이 물로 주는 세례를 받았다. 종종 종교인과 지식인은 가장 늦었다. 회개와 겸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이 물로 네 죄를 씻노라!”
(물로 내 죄가 씻어질 수 있다면 날마다 강물로 들어가고 싶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온것일까? 우리의 비겁하고 두꺼운 욕망이 끌고 온 오늘 선 자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