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예수 19 - 용서받은자 용서받지 못한자

by 희망으로 김재식




“그가 왔다!”

지붕위의 사람들이 우르르 바깥을 보면서 웅성거렸다. 예수의 천국 설명을 듣던 이들이 모두 그쪽으로 눈이 몰렸다. 거적으로 만든 들것에 한 사내가 실려서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다. 이어서 아래층의 지붕을 무너뜨리면서 아래로 내렸다.

“잠깐! 우리 집이 무너지겠어!”

베드로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그 들것과 사내를 예수 앞에 데리고 왔다. 지독한 협동심, 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못 믿겠다는 마음 반, 그럴 거라고 믿는 마음 반, 아마 내려놓은 사람들조차 그랬을 거다. 그 아픈 사람의 불행과 괴로움이 끝이 나서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애타게 바란 사람이 그 속에 몇이나 있었을까? 예수를 포함해서 몇 명이나...


“도와주소서! 20년 동안 이렇습니다! 신의 저주로 내린 내 죄, 부모의 죄이지요”

“죄는 사하여졌도다!”

모두가 기뻐하고 반길 것만 같았다. 20년이나 뒤틀린 몸으로 걷지도 못하고 사는 이웃이 예수를 만나 병에서 회복된다는데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싸늘한 비난과 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죄는 신만이 용서합니다!”

왜? 안된다고, 하지 말라고 했을까? 자기들이 믿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율법을 지키며 얻어지는 자신들의 권위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설사 그렇게 해서 병을 고친 사람이 신에게 벌을 받을지언정 그건 예수의 문제고 이웃은 병에서 나음을 입는다면 반겨야 이웃의 도리가 아닌가, 형제여! 신의 축복을 당신에게! 하는 말을 평생이나 입에 달고 살면서 말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도 신앙인들 사이에서 조차 숱하게 이런 일이 난무한다. 올바른 신학이니 균형이니 하면서 진심어린 축하보다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는 질투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어느 것이 쉬우냐? 죄를 사하여 주는 것과 일어나 가라고 말하는 것 중, 난 죄를 사할 힘이 있노라!”

“일어나 집으로 가거라!”

20년이나 누워 지내던 사내는 손이 펴지고, 예수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기가 걷고도 자기가 믿어지지 않아 당황하는 사내. 그 긴 고통의 세월에서 해방된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모든 감사와 찬양에서도 갇혀버린 영혼도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아픈 사람 귀신들린 사람을 구하는 이유를 그 갇힌 영혼이 너무 가여워서라고 했다. 때론 민망히 여겨 울기도 하셨다. 신유나 기적이란 그래야 했다. 아픈 몸이 일어나면서 영혼도 밝은 자유로 해방되는 것. 예수에게 트집을 잡고 율버으로 창살을 치려고 하던 인간들은 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다. 도대체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가두려드는 반역자들이 아닌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가두는 모든 종교율법과 교리들은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죄는 신만이 용서할 권리가 있을지 몰라도 신은 우리에게 그 권리를 양도해주셨다.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며 주기도문에 못 박아주셨다. 우리에게도 서로를 용서할 권리를 주신 것이다. 실수와 행패만이 아니라 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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