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예수 22 - 악인도 때로는 괴로워 하지만

by 희망으로 김재식



“요한! 내게 원하는 게 뭔가?”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그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쇠사슬로 묶어 놓고도 그를 찾아 왔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호화스런 궁전과 권력도 가졌고 요한을 가둘 정도로 힘도 가진 그가 말이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두려워서...

“동생의 아내를 데려온 것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인가? 그 점을 회개하면 만족할 것인가?”

그도 속에서 울려 나오는 양심의 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바깥의 적은 힘으로 틀어막으면 되지만 안에서 솟구치는 불편해지는 심정은 막을 길이 없다. 한 번 쯤 회개를 해줄까? 그걸로 양심도 좀 편해지고 문제도 풀린다면, 그런데도 요한은 그만두지 않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성 밖에서 떼로 몰려와 요한을 풀어줄 것을 시위했다. 소리지르며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것은 또 다른 불안의 요서가 될지 모른다. 머리가 아파진다.


“그대가 어두운 곳에서 썩어간다고 내 맘이 편하겠나? 권력을 원한다면 주지! 나와 같이 일하세!”

악인들이 흔하게 그러듯, 힘으로 협박으로 하다가, 안되면 구슬린다. 달콤하고 두려움을 보상하는 합리화의 길을 터주면서, 모든 사탄은 그렇게 공포와 유혹을 같이 사용한다. 모든 악인은 그런 수단에 넘어가서 조종 받으며 살게 된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이다. 세례요한은 안 넘어갔다. 그래서 그의 앞길에는 가시와 거친 돌산에서 사는 고난이 늘 따른다. 누가 그 길을 좋아할까? 아니, 이를 악무는 각오가 없는 어떤 사람들이 그 넓고 호사스러우며 쾌락이 있는 사탄의 길을 뿌리치겠는가. 고난이 없는 삶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힘들지만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땅을 사는 동안만 작동되는 법칙...

“내 임무는 왕관을 쓰실 그분의 길을 닦는 것이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예수가 직접 말했던가? 그런 신념과, 그 신념을 평생 생활로 살아낸 이가 예수 이후에 또 있었던가? 어떤 신앙인이? 어떤 목회자가? 어떤 신학자가... 물론 그 길을 따라 사는 이들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소문없이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사는 경우는 더 많을 것이고, 다만 그만큼 귀하고 흔치 않다는 표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들림 없이 살아낸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대 말과 밖의 말은 달라, 지도자와 추종자의 목적은 다를 수도 있지. 군중은 통제할 사람이 필요해!”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요한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요한이 들어줄리도 없는 말이다. 오히려 그 자신 스스로에게 위로하고 필요한 울타리 일뿐이다. 세상의 많은 독재자들과 이중적인 삶을 사는 종교지도자들과 남들을 구덩이로 안내하고 자기도 빠지는 거짓목자들에게 사용되는 말.

결국 그들은 끝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정해져있다. 피할 수 없는 결말. 욕심이 잉태한 죄의 삯인 사망...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기까지 간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거기가 끝이라면 천하에 미련하고 불쌍한 인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아니라 세례요한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뒤집을 수 없는 역사의 평가와 비난. 그것보다 백배는 중요할 영원한 세상에서의 감당할 책임과 댓가가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 땅에서는 독재자와 거짓종교지도자들과 삯꾼 목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 후를 믿는다면 그렇게 살 리가 없지 않는가?

지금도 그 구도는 계속 반복된다. 악인도 때로는 괴로워 하지만 변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불리하지만 그 길을 계속 감당하면 살아가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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